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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5.01.25(화) 18:27

2005년 대학의 풍경


학생들이 제출한 보고서 중에서 보석 같은 작품이 눈에 띌 때마다 나는 고민에 빠진다. 그냥 좋은 점수를 주고 말 것인가, 인터넷을 검색하여 똑같은 보석을 찾아낼 것인가. 불행히도 몇 개의 열쇳말 검색으로 그 탁월한 보고서의 바닥이 드러날 때가 적지 않다. 가끔은 두 학생이 우연히 똑같은 자료를 ‘참조’하여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두 개의 서평을 제출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의심과 추궁 전문의 법조계를 떠나 대학으로 왔건만, 5년의 선생 노릇 끝에 ‘스승’보다는 ‘수사관’ 쪽에 가까워진 서글픈 자화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공격적 ‘수사관’이 시험 답안지를 채점할 때면 감사에 대비하는 방어적 ‘회계사’로 변신하는 것도 재미있다. 요즘 대학생들이 얼마나 학점에 민감한지 30대 이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성적이 공개되면 ‘객관적’으로 계량화된 근거 제시를 요구하는 편지로 교수의 전자우편함이 넘쳐난다. 이에 대비한 그럴듯한 채점 기준과 세분화된 점수표의 사전 준비는 교수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학생들의 인터넷 표절과 학점 과민증세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영어를 잘하고 좋은 학점을 얻어야 취직이 된다. 그런데 영어공부에 역량을 집중하자니, 교수가 추천하는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써 낼 시간이 없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보장하는 것이 인터넷 아니던가.

결국 독서 대신 인터넷 검색을 선택하면, 개인적 경험과 감동까지 담뿍 담긴 멋진 서평을 금방 완성할 수 있다. ‘수사관’에게 걸리는 불행한 사건만 터지지 않는다면, 영어와 학점을 동시에 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 대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좀 과장하자면 이제 망국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다.

어디 대학생들만 문제인가. 교수의 모든 업적을 점수로 환산하는 업적평가방식이 도입되면서 교수들은 점수를 채우기 위한 ‘계산기’로 변했다. 이공계통에나 통할 이런 평가방식을 인문사회를 비롯한 전 분야로 확대하는 데 기여한 ‘추진력 있는’ 총장들이 개각 때마다 장관 기용의 1순위로 꼽히는 걸 보면, 그런 방식이 ‘경쟁력’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러나 인용도 높은 외국학술지 200점, 학술진흥재단(학진) 등재지 100점, 저서 150점, 번역 70점 따위로 수치화된 획일적 평가체계 속에서, 교수 자신의 오랜 사색을 담은 긴 호흡의 저술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학진 등재지를 만들기 위해 논문 탈락률을 조작하는 학계 일각의 관행도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끼리끼리 모인 학술지일수록 조작은 더 쉽고, 그런 조작을 마친 학술지는 곧장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학술권력’으로 부상한다.

피 말리는 번역을 하느니, 외국 논문들을 적당히 조합한 내 이름의 논문 한 편을 쓰는 것이 점수 따기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번역서도 나올 수 없다. 아무도 안 읽는 논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한편에서, 출판기획자들은 최소한의 글 솜씨를 갖춘 교수 필자를 찾기 어렵다고 한탄한다. 논문 실적을 발판삼아 ‘더 나은’ 대학으로 신분 이동을 꿈꾸는 일부 교수들이 자신과 ‘수준이 안 맞는’ 학생들의 지도를 포기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학점에 목맨 학생과 학진에 목숨 건 교수들이 서로를 방치하는 가운데, 대학과 인문학은 그렇게 함께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경쟁력 있는 대학을 만들겠다고 대통령과 대학총장들이 난리를 치면 칠수록, 대학생들은 더욱 더 책을 읽지 않는다. 대통령과 총장들이 말하는 ‘경쟁력’ 속에 인문학적 교양이 포함되지 않음을 영악한 대학생들이 진작부터 알아차린 까닭이다. 이런 위기 속에서 교육의 ‘산업적 측면’에 눈을 돌린 대통령은, ‘우리 경제계의 요구를 대학에 정확히 반영할’ 교육부총리를 찾고 있다. 그러나 누가 교육부총리가 되든지, 교양서 한 권 읽은 적 없는 대졸 ‘통역기계’들이 만들어갈 ‘선진조국’의 미래는 보나마나 뻔하다.

김두식/한동대 교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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