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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5.01.14(금) 17:23

민주화 이후, 우리의 좌표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애덤스는 “민주주의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지쳐서 스스로를 죽이고 만다”라고 민주주의가 달걀처럼 깨지기 쉬운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한편, 프랑스의 정치가 토크빌은 민주주의는 평등과 관용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갖고 있지만, 무질서와 권위상실을 가져오거나 인간을 욕망의 노예로 만들 수도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곧 지난 세계사를 돌아보면 민주주의는 억압과 차별을 뒤집어버리는 해방의 복음이기도 하지만, 어떤 가치와 이상으로 보완되지 않을 경우 아노미, 파시즘의 씨앗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7년 이후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우리가 걸어야 할 민주주의의 길은 아직 멀었다. 정치적 민주화는 사회경제 영역, 그리고 풀뿌리 차원으로 심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냉전의 유물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주요 화두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자유화, 시장화의 물결은 민주화의 이상을 금방 빛바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정치적 민주화는 경제적 노예화를 수반하였다. 그래서 정치의 가장 일차적인 과제도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정치라는 것은 대중들의 먹을거리를 챙겨주고 그들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 길로 인도해주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그래서 지난 시절 민주화 운동의 힘으로 권력에 진출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력을 자랑하기보다는 시대의 과제변화를 읽어야 하고 대중들의 고통에 답을 해 주어야 한다. 민주화 운동 경력이 곧 사회를 이끌 수 있는 면허장은 아니다.

지난 100년 한국의 ‘주의자’들의 가장 큰 결점은 투쟁은 영웅적이었으나 생각이 진중하지 못했으며, 세상을 멀리 볼 수 있는 시야가 없었고, 대중들의 영혼을 울리는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한용운이 개탄했듯이 어제의 갑(甲)주의자가 오늘의 을주의자, 병주의자로 변신하는 일은 꼭 오늘의 ‘뉴라이트’ 그룹이나 ‘구조조정’을 개혁이라고 칭송하는 현 정부의 옛 민주화 투사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국 현대사 속에서 이미 수많은 선례가 있다. 문제는 권력자가 되는 ‘주의자’들, 민주화 운동 경력자들이 정치공학을 정치로 착각하고 있으며,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 정치적 힘이 없어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미국의 파병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이러한 정책들이 장차 우리 사회의 미래에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인지 깊이 생각하면서 가용한 대안과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30년 개발독재의 유제가 하루아침에 청산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수구세력이 일거에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신주류가 된 오늘의 집권세력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꿈을 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성취된 90년대 이후에는 ‘어떤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인가라는 추가적인 정책적, 이념적 의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으며, 대중은 경제위기와 불평등을 감내할 정도로 인내심이 깊지 않다는 것 역시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 반전, 인권의 가치를 절대화했던 미국의 반전운동세력과 자유주의자들은 계속되는 ‘권리주장’과 ‘반대’에 염증을 느낀 평범한 시민들이 모두 우파의 선동에 매력을 느껴 레이건 이후 ‘반동적 혁명’의 지지자가 되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았다. 오늘의 한국도 이와 유사한 상황으로 갈 수 있다. 늦었지만 노동·시민운동 진영, 그리고 현 집권세력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어떤 비전을 갖고서 이 국가 시스템을 바꿀 것이며, 무엇으로 오늘날 피곤과 절망에 지친 한국의 대중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줄 수 있는지를.

김동춘/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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