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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5.01.06(목) 18:54

한반도식 ‘접근을 통한 변화’


한국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1960년대 말~70년대 독일의 동방정책을 거울로 삼고 있다. 독일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기민당 정부의 냉전적 동방정책 대신 ‘새로운 동방정책’을 세웠다. 소련, 폴란드 등 사회주의 나라들과의 화해협력 및 특히 동독과의 교류정책이 추진됐고, 이로써 독일 통일의 초석이 놓였다. 당시 브란트의 핵심참모였던 에곤 바르는 대동독 정책의 성격을 “접근을 통한 변화”라 규정했으며, 실제로 서독과의 인적·물적 교류를 통해 동독사회는 크게 바뀌었다.

브란트의 신동방 정책과 한국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국제적 여건은 다르다. 신동방 정책이 시작되던 시기는 냉전이 한창이었으나 미국과 소련은 이 정책을 지지하고 도와주었다. 미국이 이른바 데탕트 정책으로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꾀하고 있었던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런데 남북한 화해정책의 경우, 냉전은 오래 전에 끝났건만 미국이 방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서 국제 여건상 동방정책보다 오히려 불리하다.

내부 상황은 어느 면에서 비슷하다. 독일에서도 기민·기사당 다수파는 브란트의 정책을 격렬히 반대했다. 그들은 신동방정책 때문에 서독사회가 사회주의권의 이념·정책 공세에 경각심을 가지지 않고 이념적으로 양극화되었으며,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보수세력의 공격 끝에 브란트는 측근과 관련된 스파이 사건의 와중에서 실각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그 후 사민당 출신인 헬무트 슈미트 총리 정부뿐 아니라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 정권에서도 계승됐다. 보수세력도 자기네가 죽어라 반대하던 대동독 교류정책말고는 대안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국 보수세력은 기민·기사당보다 훨씬 격렬하게 대북 화해정책을 비판한다. 현재 비판의 초점은 북한 핵문제와 인권문제에 맞춰져 있다. 핵문제는 6자 회담을 통해 투명하게 밝혀지고 해결돼야 할 것이다. 한국에도 핵무장론자가 있고, 통일되면 북핵도 우리 것이 아니냐는 논지도 가끔 등장하지만, 이는 허용될 수 없다.

그런데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보수세력의 비판은 초점이 어긋나 있다. 한 정권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하고 대화상대로 삼는다는 것은 그 정권의 모든 정책을 도덕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한국은 90년대 초에 소련과도, 중국과도 수교했다. 모두 공산당 정권을 상대로 해서였다. 이들 정권 아래서 인권의 침해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국이 이들과 수교하고 소련에 경제원조까지 제공한 것은 이들과의 평화협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의미였지 이들 정권의 인권정책을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양자를 분리시키고 별개의 차원에서 각각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누구도 여기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보수 우파는 북한에 대해서만 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국 보수세력은 북한 인권법을 제정한 미국 네오콘과 마찬가지로 북한 정권의 붕괴를 목적으로 삼지만 그 이후를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 한국이 경제력으로 책임질 수 있는가? 미국이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독일 통일이 이루어진 다음 브란트는 동독인들에게 “하나에 속하는 존재들이 함께 성장하자”고 감격적인 어조와 표정으로 말한 바 있다. 그는 결코 동독사회에 대해 내려다보는 자세로 접근하지 않았다. 동독이 서독과의 평화적 교류를 통해 점진적으로 변화할 것을 기대했을 뿐 아니라 서독사회도 동독과의 교류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고 믿고 동서독인들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겠다는 자세로 그들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지름길은 ‘당신을 믿겠다’는 것을 전제로 한 후에 북한사람들 스스로 바뀔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다. 남한 사회도 인권유린의 대표적 악법인 국가보안법 하나 없애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인권과 자유의 이름으로 숱한 죄 없는 이라크인들을 죽이고 있는 미국식 인권정책보다는 ‘우리, 같이 성장합시다’라고 권유했던 브란트식 인권정책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필요하다.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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