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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2.31(금) 18:23

암울한 시대에 희망 찾기


이박삼일 일정으로 가족과 함께 지리산 화엄사를 찾았다. 2004년 한 해에 쌓인 무거운 앙금을 씻어내고 새해를 밝고 깨끗한 마음으로 맞이하려는 뜻에서 출발한 여행이었다. 하동에서 구례로 이어지는 19번 국도를 따라 겨울 햇살에 빛나는 섬진강의 은빛 물이 서늘했다. 애꿎게 죽어가는 이라크인들에 대한 연민, 16대 국회의 대통령 탄핵 때의 울분, 17대 총선의 감격, 헌재의 신행정수도건설안 위헌판결 때의 황당함, 부시 재선 때의 낙담, 파행을 거듭하는 국회에 대한 짜증스러움 등 온갖 감정덩어리가 모두 섬진강물에 씻기는 듯했다.

하지만 2004년은 끝까지 나를 평온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여장을 푼 모텔의 텔레비전은 인도네시아 대지진으로 말미암은 아비규환의 현장을 보여주었다.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 타이를 휩쓴 해일의 희생자가 불어날수록 내 마음은 무거워졌다.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 김춘봉씨의 자살 소식도 가슴을 저몄다. 전쟁과 재앙이 빈발하고 양극화와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이 어두운 시대에 호젓한 겨울 산사를 찾아 마음을 비워보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대참사로 울렁이던 마음은 차가운 겨울 날씨에 허허롭게 서 있는 소나무들을 지나 화엄사의 고색창연한 자태를 대하면서 차차 가라앉았다. 그러는 동안 지구촌 참상의 현장에 사로잡힌 내 마음의 정체를 헤아려보았다. 나의 상심이 진정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타자의 고통에 무감하지 않다는 것을 내세우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부처나 관음보살의 자비심과는 달리 타자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상심이 세상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자신이나 타자에게 보탬이 되기는커녕 독이 될 수도 있다.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연민이란 작으나마 어떤 희망에 근거한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결국 자기연민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때의 희망이 실현가능성이 없다면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하는 헛된 미망이 될 것이다. 그런 만큼 희망을 어디에 둘지 냉정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2005년 새해에 지구촌과 한반도에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이 더 많이 들려올 공산이 크다. 생태계 파괴와 기후온난화의 결과로 이번 동남아 지진참사보다 더 가공할 재앙이 닥칠지 모르며, 신자유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줄 수도 있다. 이라크에서는 1월30일로 예정된 선거를 앞두고 폭탄테러가 더욱 빈번해질 것이며 이것이 종족간 내전으로 번져 자이툰 부대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우리는 분명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암울한 상황의 상당 부분이 미국이 몰락하는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발악하고 있는 데서 빚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장에는 어렵더라도 지금의 미국 패권체제보다는 좀더 나은 세계체제를 머지않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또한 이라크전에 발목 잡힌 미국이 북핵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할 공산이 줄어든 것도 우리로서는 다행스런 일이다. 부시의 재집권과 네오콘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재천명한 것이나 개성공단을 비롯한 남북경협 사업이 지속되고 있는 것 역시 희망을 걸 만한 대목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폐해가 심각하지만 사회의 안전망을 확충하고 실업자와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위해 시민사회 전체가 함께 노력한다면 이들이 절망에 내몰리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햇살에 반짝이는 섬진강을 보면서 새해에는 마음자리를 아주 아래에 두고 마음공부와 세상공부로 희망을 찾아내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에 힘써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한기욱 인제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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