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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2.28(화) 19:32

간첩 논란이 끝난 후


한참을 끌 것처럼 보였던 ‘간첩 폭로’ 사건은 색깔 논쟁 시대의 퇴조를 예고하며 불과 20일 만에 파장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이번 사건은 민주화 이후 건강해진 우리 이념 지형을 확인시켜준 동시에, 민주화운동 참여자들에게만 역사의 무한 책임을 지우고자 하는 우리 사회의 아픈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한나라당의 폭로 이후 보수언론이 한목소리로 요구했던 것은 이철우 의원의 정직한 고백이었다. 장로의 아들로 태어나 학생운동에 투신하며 교회를 떠났다가 출소 이후 기독교 신앙으로 회귀한 이 의원의 인생 여정은 그 자체로 고백이었건만, 이에 대한 성의 있는 취재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처럼 집요한 고백과 전향의 요구가 그 때 그 시절 ‘뭔가를 했던’ 사람들에게만 집중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행동이 요구되던 시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든 고백 요구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인간 존엄성이 무참하게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실력부터 쌓아야 한다’ ‘폭력적인 투쟁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월북한 가족이 있는 가정형편상 운동에 나서면 끝장이다’ 등의 자기 합리화 속에 끝내 거리로 나서지 못했던 나를 포함한 수많은 30~40대들은 정말 아무 것도 고백할 것이 없는가. “공포 때문”이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대신, “그 때 이미 주사파의 전횡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했노라”고 새로운 변명거리까지 추가하는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은가.

시대착오적인 논란이 계속되는 동안, 이철우 의원 못지않게 주목받은 이가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이었다. 심 의원이 색깔 공세에 힘을 보태는데 분노한 열린우리당은 심 의원을 향해 연일 직격탄을 날렸다. 12월12일 김현미 대변인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 심 의원이 어떻게 처신했는지 당시 구속된 수많은 인사들이 지켜보고 있다”면서 “가련하고 슬픈 가롯 유다”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다음 날 심 의원의 25년 지기인 유기홍 의원은 “더 이상 그 당시 재판에서 심 의원이 어쨌다든지 하는 얘기는 하지 않겠다”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다시 거론했다. 고문피해자인 심 의원이 같은 고문피해자인 이 의원에게 어찌 용공의 덫을 씌울 수 있냐는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심 의원의 ‘처신’을 구체적으로 세상에 알린 것은 <오마이뉴스>에 실린 ‘80년, 심재철 의원이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글이었다. 이 글은 당시 공판정에서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수사과정에서의 가혹한 고문을 폭로하며 자백을 번복했으나, 심재철 학생만은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여 관련자들이 중형을 선고받는데 일조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가슴 쓰린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심재철 학생의 법정 증언이 없었더라도 관련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리란 사실은 누가 봐도 명백하다. 고문으로 받아낸 피의자신문조서들만으로도 유죄를 인정하는 증거는 충분했을 것이고, 쿠데타 세력에 의해 장악된 군법회의와 대법원이 다른 결론을 내렸을 가능성도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알고 있을 동료들이 심 의원의 아픈 과거를 들춰내는 것을 보고, 나는 절망했다. 정작 비난받아야 할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은 그냥 놓아둔 채, 왜 고문피해자들끼리 이런 논쟁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고문이 죄지, 고문에 굴복한 것이 죄가 될 수는 없다.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삶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한 사회’에서 더욱 고달프다. 가혹한 고문 앞에 굴복했기 때문에 부끄러워해야 하고, 운동의 출구를 찾고자 급진적인 사상에 경도된 과거가 있으니 그것도 고백해야 한다. 운동 과정에서 폭력을 사용한 일이 있으면 반성해야 하고, 정치에 참여하면 ‘운동하느라 공부도 안 한 것들이…’ 하는 곱지 않은 눈길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에 비하면 그 때 그 시절 ‘아무 것도 안 하며 자기 이익만 좇았던’ 다수에게 이 사회는 확실히 살 맛 나는 곳이다. 그런 사회에 미래가 있는가는 물론 별개의 문제지만.

김두식/한동대 교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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