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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2.24(금) 18:48

‘부안사태’ 그렇게 겪고도…


그동안 실패만 거듭해왔던 핵폐기장 정책에 꽤 큰 변화가 왔다. 중저준위 핵폐기물과 사용후 핵연료를 분리해서 처분하기로 하고, 우선 중저준위 핵폐기장만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아직 확정은 안됐지만 여론조사와 주민투표를 실시하려는 것도 새롭다. 이 내용만 가지고 새로운 핵폐기장 정책을 평가하면 분명 진일보한 면이 있다. 지금까지 정부에서 추진해왔듯이 중저준위 핵폐기물과 사용후 핵연료 처분장을 한 곳에 건설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적으로만 보면 서로 분리해서 열을 내뿜지 않는 중저준위와 열을 내뿜는 사용후 핵연료 각각의 특성에 적합한 지층을 지닌 지역에 건설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다. 주민투표를 도입하여 주민들이 찬성할 때에만 핵폐기장을 건설하겠다는 것도 획기적인 변화로 볼 수도 있다. 지난해 부안에서 주민들이 요구했던 주민투표를 갖은 이유를 대면서 끝내 거부했고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 주도의 투표 결과마저 인정하지 않았던 정부가 주민투표를 거치겠다고 나선 것이 핵폐기장 건설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그러한 변화에 기초한 이번 중저준위 핵폐기장 건설이 성사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다. 방사능의 정도도 미미하고, 주민투표도 실시하고, 3000억원으로 책정되어 있는 지원금까지 고스란히 지역을 위해서 투입하는데, 성공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핵폐기장은 긴 실패의 역사, 저항의 역사를 지닌 것이고, 따라서 복합적이고 미묘한 여러 가지 사회적 변수를 지닌 것이다. 지역주민들은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핵폐기장을 바라본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방사능이 약한 중저준위 핵폐기물의 분리처분이라는 변화는 주민들에게 별다른 호소력을 지니지 못한다. 주민투표의 경우도 단순하게 여론조사 후의 투표 실시만으로는 주민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바꾸기 어렵다. 과반수 주민이 찬성하더라도 나머지 주민이 핵폐기장이 위험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거세게 저항하는 사태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3000억원이란 지원금도 군 단위에서 보면 큰 것이 아니다. 도로를 놓고 큰 건물 한두 개 건설하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번 발표 과정을 보면 정부는 부안의 저항을 작년 내내 겪었는데도 아직까지 핵폐기장이 복합적인 면을 지닌 사회적 사안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원자력 관련 최고의결기구인 원자력위원회를 단 한차례 열어 중저준위 핵폐기장만 우선 건설한다고 결정하는 것도 이러한 인식부재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니 정부가 그럴듯한 내용을 발표해도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핵폐기장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은 정부가 자신의 진정성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사소한 사안이라도 공론화를 통해서 투명한 방식으로 결정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방사능이 약해서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중저준위 핵폐기물 처분도 기술자들의 자문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공개적이고 광범위한 토론을 통해서 결정하는 것이 성공의 첫걸음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아직 시작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국가보안법 폐지, 언론개혁, 사학법 개정 등 민주사회로 나아가는 진통은 계속되고 있다. 이 진통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 과정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사법도 과거에 저질러진 잘못을 드러내어 죄를 묻자는 것이 아니라 반성을 통해서 새로워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지난 10여년간 정부와 지역주민에게 상처만 안겨준 핵폐기장 정책에 대해서도 반성이 있어야 한다. 반성은 기술적인 방식만 바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반성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하고, 이는 아프지만 진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권위주의 정권이 끝난 지 이제 10년, 민주화에 대한 참여정부의 책임이 막중할 터인데, 핵폐기장 문제를 민주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일도 그 책임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이필렬 방송대 교수·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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