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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2.14(화) 19:54

과잉사회, 역동사회, ‘첨단사회’


대학 수능시험 부정사건은 한국사회의 예외적 성격을 잘 보여 주었다. 이번 사건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학력 만능주의가 최신 기술과 결합하여 사회의 엔트로피를 얼마나 높였는지 목격하였다. 만인의 교육이라는 근대적 이상이 이 땅에서는 전혀 다른 문젯거리로 바뀌었다. 세계인권선언에 나오는 교육권의 핵심은 자아실현과 인간해방이다. 인간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 ‘더 많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정확히 반세기 전 남아공에서 인종차별 정책 저항운동이 본격화되었을 때 제기된 핵심요구 중의 하나가 바로 유색인종의 교육받을 권리였다. 그러나 이런 고전적인 교육정신은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공부하고, 국제 학업성취도가 세계 1위라지만, 우리의 청소년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고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더 적지만’ 옳은 교육이 행복으로 가는 계단이 되었다. ‘더 적은’ 교육권리는 인권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개념이다. 이는 극단적으로 과잉된 우리의 근대기획이 초래한 역설이다. 모든 사회가 보편과 특수의 복잡한 지형을 따르지만 우리는 전혀 새로운 근대유형에 속하는 사회로 이미 발전한 듯이 보인다.

근대기획의 한국적 변용이 긍정적일 수도 있다. 시민사회운동이 그러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만큼 활성화된 시민사회도 없다. 예컨대 시민사회가 기성정당을 제치고 유권자를 직접 동원하여 선거과정에 개입하는 패턴은 세계적으로 선두주자에 속한다. 최근 들어서야 전세계 학계가 주목하기 시작한 ‘시민사회와 투표함’ 논쟁이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현상이다. 나는 요즘 그루지야의 ‘장미혁명’ 또는 인도와 스페인의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한 시민사회의 힘을 분석한 글을 읽으면서 다시금 우리의 경험이 한발 앞서 있음을 느낀다. 그만큼 우리 시민사회운동은 역동적이어서 외국의 수입이론으로 분석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뿐인가? 아이티 혁명, 인터넷 언론, 정보사회의 폭발적인 증가 역시 우리 시민사회의 특징이자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현상이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근대기획은 한편으로 과잉 비대하여 새로운 문제를, 다른 한편으로는 역동적으로 변환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낳고 있다. 과잉성과 역동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따라서 근대기획의 새로운 지평을 최전선에서 열어가고 있다는 뜻에서 한국은 ‘첨단사회’다. 세계 사회변동의 일정한 유형을 찾는 연구자들에게 한국은 늘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우리는 이들에게 아시아 신흥공업국으로서 세계체제론에 예외를 만들면서 이미 한 차례 놀라움을 주었고, 최근 들어선 사회발전의 독특한 전개양상을 통해 두 번째로 난제를 안겨주고 있다. 이러한 예외성으로 인해 한국사회는 외부로부터 적당한 준거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회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소위 선진국의 사례를 찾는 경향에 대해 한편으로는 수긍을 하면서도 그것의 한계를 항상 느끼게 된다. 배경도 맥락도 다른 이야기를 이상화시켜 아전인수 격으로 끌어다 해석하는 위험 때문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한국 사회가 이미 내면화한 특성을 감당하면서 그것을 스스로의 고민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러한 길 찾기의 과정에서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정표가 없는 게 아니다. 거창하게 말할 것 없이 나는 그것이 소박한 계몽주의적 이성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의 정신으로 우리의 과잉성과 역동성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는 게 필요하다. 무엇을 위한 과잉인지, 어떤 방향으로의 역동인지를 늘 따져 보아야 하겠다. 또한 계몽주의는 평등과 형평의 관점을 요구한다. 예컨대, 형편이 안 되어 이번 사건의 개연성에서 원천적으로 제외되었던 응시생이 “돈이 있었으면 저도 했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저변에 깔린 입시부정의 뒤틀린 계급적 성격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성의 원칙으로 균형을 잡을 때에 우리 식 ‘첨단사회’가 건설적인 예외주의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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