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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2.12(일) 21:33

‘보안법의 하나님’


머리가 많이 벗겨진 그는 지하 감금방 복도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 성경 말씀이 주절주절 나오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잠시 뒤 수사관이 나타났다. 수사관은 옆방 문을 꽝 하고 열었다. 이 짜식이 거짓말을 했어, 수사가 엉망이 됐어! 라고 고함쳤다. 젊은이는 소스라친다. 성경을 읽던 그는 30센티 정도 되는 봉을 꼰아 쥐었다. 그래요? 이 녀석이 거짓말을 했다구요? 그는 봉으로 그냥 내려치지 않았다. 내리찍었다. 봉 끝이 온몸의 급소를 푹푹 파고든다. 명치, 견골, 옆구리, 등뼈, 목덜미 …. 처참한 비명이 흘러 나온다.

한바탕 굿거리가 끝난 뒤 젊은이가 축 늘어졌을 때 그는 다시 복도의 탁자에 정좌했다. 하나님 아버지 …, 주절주절 성경 말씀이 흘러 나온다.

24년 전 국군 보안사 대공처 6과 서빙고 분실, 속칭 서빙고 호텔 지하 감금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서빙고 호텔은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서슴지 않아 남산 중앙정보부와 함께 공포정치의 대명사로 통했다. 나는 그가 보안사 중사였다고 기억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기도했다. 박정희가 죽은 지금, 이 나라는 풍전등화입니다. 하나님, 저 좌경세력으로부터 우리 장군님을 도와주소서. 장군님이라면 평양의 김씨가 생각나겠지만, 그때의 장군님은 김씨가 아니라 전씨였다.

당시 서빙고 호텔이나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잡혀간 젊은이들은 국가보안법과 게엄포고령으로 얽혔다. 국가전복죄나 간첩죄와 연결될 수 있는 보안법은 그야말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수사관들은 연행된 젊은이들을 보안법으로 엮으려 했지만 자료가 충분치 않았다. 자료가 충분치 않은 만큼 폭행과 고문은 더해졌다.

이제 보안법도 꽤 약화됐다. 당장 폐지하느냐 그러지 않느냐를 다투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명운이 다했다고 할 수 있다. 남북의 적대가 약화하고 정권 유지를 위한 고문도구가 필요하지 않은 요즘 세상에, 보안법이 온전하게 발 뻗을 수 있는 공간은 일부 극우보수층의 의식공간 정도가 될 것이다. 검찰 공안부의 존폐가 논의될 만큼 보안법을 들먹여야 할 사건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보안법의 망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얼마 전 서울 시청 앞에 수십만 기독교 신도들이 모여 국가보안법 수호 국민대회를 여는 것을 보고선, 서빙고 호텔의 중사를 떠올리며 보안법과 하나님의 그 절묘한 결합에 다시 탄식한 적이 있다. 확실히 우리 사회에는 군부독재, 반공주의, 차별의식, 반북의식, 사대적 친미 등등이 결합한 미묘한 종교적 의식이 존재한다. 그 의식이 현실정치와 결합할 때 하나님은 부드러운 권력(soft power)으로 변환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안법의 그 잔혹함이 하나님의 자비로움과 결합할 수 있는지!

나는 보안법의 앞날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정기국회 마지막 날을 장식한 이철우 간첩 소동과 같은 일은,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전면적으로 재수사 재해석돼야 할 사건을, 오늘날에는 거의 의미가 없는 12년 전 보안법의 잣대로 재단하려 한다는 점에서, 한마디로 궁색하고 치사하다. 그런 식이라면 한나라당에서도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한나라당은 끝까지 보안법 폐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받아들이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보안법이 바로 자신이라니까. 어차피 보안법은 곧 명줄이 끊어진다. 보안법의 존재 근거가 무너지면 된다. 북핵문제가 해소되고 2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면 법전에서 보안법이라는 단어를 지울 필요조차 없어질 것이다.

올 1월, 나는 그 서빙고 호텔이 헐리고 그 자리(알고보니 2천평이나 됐다)에 기무사 직원들의 아파트가 들어섰다는 얘기를 들었다. 악명 높았던 서빙고 호텔이 기무사 직원 가족의 보금자리로 바뀌었다는 것이, 참으로 세월이 무상했다.

이홍동 편집부국장hdlee8@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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