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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5.23(일) 17:23

한미동맹의 미래 청사진이 없다


미국이 주한미군 2사단 중 1개 여단을 이라크로 차출하기로 결정한 직후인 지난주 중반 미국 대사관 쪽 관계자들과 몇몇 기자들이 만나 최근 한-미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 한국내 반미감정, 외국 기지에 대한 미국인들의 부정적 인식 등을 화제에 올리면서 우리는 한-미 관계가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 중요한 지점에 이르렀다는 한 참석자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했다.

실제로 미국의 주한미군 차출 결정은 단순히 3400~3800명의 미군을 이라크로 보낸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미국은 이것이 그동안 공언해온 외국 주둔 미군 재배치의 일환으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 차출 부대가 한반도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주한미군은 감축되고 그동안 한국 방어를 주목적으로 했던 한-미 동맹 관계의 성격도 근본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한-미 동맹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으며, 그렇게 설정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는가는 우리나라의 장래와 관련해 극히 긴요하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최근 몇 군데 여론조사는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고 있다. 우선 한겨레 창간 기념 여론조사에선 대외정책의 우선순위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9.2%가 ‘남북협력 강화’를 꼽고, ‘동북아 지역협력체제 구축’(22.4%), ‘주변 열강과 등거리 외교 강화’(20.1%)보다도 훨씬 적은 9.3%만이 ‘한-미 동맹 강화’를 선택했다. 또 <에스비에스>가 21일 공개한 여론조사에선 응답자의 58.7%가 이번 주한미군 차출을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보고 63.9%는 어렵더라도 대등한 한-미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답했다. 이런 결과는 우리 국민의 상당수가 기존의 불평등한 한-미 동맹 관계가 개선되기를 희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무현 대통령이 주한미군 차출 결정과 관련해 20일 열린 안보관계 장관 회의에서, 미군 재배치는 이미 예견돼왔던 것이라며 “협력적 자주국방 체계의 조기구축에 필요한 조처를 검토하라”고 지시한 것은 이런 국민들의 인식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협력적 자주국방이란, 노 대통령이 취임 초 제시한 자주국방 주장이 한-미 동맹을 약화시킨다는 보수파들의 비판을 수용해 현 정부가 지난해부터 국가안보 전략 기조의 하나로 내세운 것으로 한-미 동맹과 자주국방의 병행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위한 정부의 구체적인 복안이 무엇인지 불명확하고 그런 정책 기조를 감당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도 의심스럽다는 점이다. 자주국방론과 관련해 국방부 주변에서는 예산 뒷받침이 되지 않아 소리만 요란한 빈수레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한-미 동맹의 강화와 관련해서도 한국 쪽이 주체적 방향을 가지고 대응하지 못하고 미국의 요구에 끌려가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 결정과 그를 공개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해프닝이다. 럼스펠드가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 가능성을 시사한 뒤 열린 미래한미동맹 회의에서 한국의 한 당국자가 이 문제를 물었음에도 미국 쪽은 아무런 확인도 해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한 신문에서 주한미군 4000명을 이라크로 차출한다는 보도가 나온 뒤 발표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국가안보회의의 스티브 해들리 안보부보좌관이 자신의 상대역인 한국의 국가안보회의 관계자 대신 반기문 외교장관에게 공식 설명하는 이상한 모양새를 취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도록 요구한 정부의 한 관계자는 그 까닭을 해들리가 우리 국가안보회의 관계자들과 친분이 없다며 반 장관을 지명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이런 일방주의적 태도는 한국 영토에 미국군을 주둔시킬 권리만을 인정한 불평등한 한-미 방위조약 탓이기도 하지만, 우리 쪽 외교역량의 문제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국제질서란 것이 단순히 현실의 힘의 관계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주체의 인식이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측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권태선 편집부국장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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