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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2.29(수) 18:55

통일 수업


“김정일 장군님의 저서 한 번 읽어보라요.” 금강산에서 이틀째. 구룡폭포로 가는 길에 북한 안내원의 과감한 권유가 나왔다. 등산로 들머리인 앙지다리부터 한 시간이 넘게 그와 대화한 뒤였다. ‘북한’ 대신 ‘북조선’이라 부르고 미국의 대북 정책을 그의 입맛에 맞게 비판한 까닭이었을까. 다소 머뭇했지만 ‘장군님’을 처음 말한 그였다. 그 머뭇거림은 금강산에서 내가 자유민주주의의 우월함을 얘기하기가 조심스러운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긴장을 녹이는 데는 유머 감각이 제격이다. 안내원은 “김정일 장군님은 대학 4년 동안 1200여권의 저서를 썼고, 난 6년 동안 그걸 전부 공부했다”고 말했다. 보통 남한 사람의 머릿속엔 ‘그게 진짜면 김정일이 왜 노벨상을 못 탔는지 모르겠다’는 조롱이 맴돌 터다. 그러나 대화의 지속을 원한다면 ‘읽은 게 쓴 것보다 훨씬 느리네요!’라는 ‘농’ 정도는 던질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재치는 북에 대한 맹목적 이해를 넘어, 마음속 이질적 담을 허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내원에게서 그 담은 높게만 느껴졌다. 온정리가 고향이라는 그는 금강산에서 5년 동안 안내원으로 일했지만 남한에 대한 호기심을 못 참았다. 나 또한 북한을 처음 체험한 터라 궁금증만 쌓였다. 대화는 그래서 동문서답으로 겉돌았다. 그는 내 질문에 답 대신 남한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물론 나는 그와 반대였고. 상대에 대한 이런 무지는 ‘적’에 대한 좋은 평가를 ‘범죄’로 규정한 두 사회가 낳은 필연적 상황일 터다.

그렇게 말이 엇갈려도 안내원은 한데로 관심을 집중했다. 그는 남한의 학생운동과 총학 선거에 또렷한 흥미를 드러냈다. 안내원은 특히 ‘선거’라는 민주적 장치에 대해 낱낱이 물어봤다. 나는 우리 대학교의 지난 총학 선거에 네 팀이 나왔고, 보통선거로 소위 ‘비권’이 당선됐다고 전했다. 감히 판단하건대, 그의 눈빛에는 운동권의 낙선에 대한 아쉬움과 선거의 자유로움에 대한 부러움이 뒤섞여 있었던 것 같다. 나를 통치할 사람을 내가 뽑는다는 상식이 그에겐 지극히 낯설게 다가갔을 것이다.

그 낯섦은 내 눈에도 어렸다. 그가 ‘조중동’이란 말로 남한 보수 언론을 비난할 때가 그랬다. 북한에는 세뇌와 부자유가 그득하다는 남한의 편견은 거짓이라 주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로동신문〉과 〈통일신보〉 등 권위주의적 정권이 주입한 정보에 갇혀 있는 안내원은 그래서 더 낯설었다. 〈로동신문〉이 통제한 현실사회주의 속에서야 사상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 정한 생각의 한계를 넘지 않는 한 문제될 것 없으니. 하지만 그 편협함을 자유라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안내원의 자유일 뿐이었다.

북한에 대한 조금의 이해와 답답함을 안고 하산하는 길. 예비 통일 수업이 남긴 것은 분명했다. 반세기 넘게 다른 원리로 조직된 사람들이 하나로 합친다는 것, 그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남북이 하나의 정부와 의회를 만드는 것은 외려 쉬운 일이다. 통일된 지 15년이 지난 독일에도 아직 두 개의 국민이 있다. 우리도 ‘베씨-오씨’의 한국판이 재현될 날을 준비해야 한다. 금강산에서는 지금도 두 국민이 힘들게 하나 되고 있다. 그런 뜻에서 금강산은 흥겨운 관광 사업을 넘어 소중한 통일 사업이다.

박세용/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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