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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5.01.09(일) 18:04

용기 있는 여자들의 나라


사상 최악의 아시아 지진해일 소식 속에 오래도록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수많은 인명 피해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 야생동물 보호지역에 서식하던 동물들은 단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천지의 요동을 감지한 새의 무리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호랑이와 표범 같은 맹수들조차 유순하게 행동하며, 겨울잠을 자던 곰과 뱀도 밖으로 뛰쳐나와 고지대로 대피했다. 인간에게 ‘지배’당하며 ‘보호’받던 그들은 오롯이 한결같은 욕망, 살고자 하는 거룩한 본능으로 재해 상황에 대처했다. 그리하여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날짐승과 멧짐승만큼도 본능에 충실하며 살지 못한다는 것을,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푼 인간의 욕망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오만에 다름아님을.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급속한 저출산 고령화 사회 진입에 대하여 “사전에 대비하고 개선하지 않으면 재난적 상황을 몰고 올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을 같은 줄거리에서 생각해 본다. 종족 보존은 동물의 본능이다. 인간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자연의 순리대로 새끼를 낳아 품에 끼고 잠드는 일은 언젠가 반드시 소멸하는 존재가 유한한 삶을 위로받는 가장 본능적인 방식이다. 그리하여 지금껏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절대적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서 자연이 부여한 유전자의 요구에 충실해 왔다. 그것은 모성애가 철철 넘쳐흐르는 ‘현모’든 ‘비정한 엄마’든 피해갈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더는 ‘자연적’이지 않다.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여성들을 폄하하고 비난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던 엄마의 신화, 모성애의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며, 어머니가 될 수 없거나 되지 않았던 여성들을 영원히 약한 계집아이로 취급했던 사회는 ‘본능’마저 넘어선 보복에 당황하고 있다. 한국의 출산율은 2002년 기준 1.17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경에 이르렀다. 여성들은 왜 ‘출산 파업’을 감행하는가? 정관수술에 건강보험을 적용하지 않고 출산장려금 20만원을 주면 없던 아이들이 비 온 뒤 죽순처럼 솟아나줄 것인가?

아이는 단순히 내일의 세금원이 아니라 현재의 지속이며 다가올 미래다. 그러므로 젊은 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것은 위태로운 현재와 불안한 미래 때문이다. 모든 차별과 불합리를 감수하고 오직 희생 헌신하는 간난이와 몽실이는 이제 없다. 현재의 가족제도로는 젊은 여성들의 변화한 생활방식과 사고를 유지할 수 없다. 저출산 현상은 더 이상 지금 식으로 살 수 없다는 여성들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혈연을 강조하는 가족이기주의, 육아 인프라의 부재, 성폭력과 따돌림 문화, 사교육비로 인한 엄청난 양육비용, 일방적인 가사노동과 재취업의 어려움, 한편으로 낮은 출산을 근심하면서 낙태와 고아수출국 1위의 오명을 벗지 못하는 뻔뻔스런 사회 등등, 아이를 낳아야 할 이유보다는 아이를 낳지 못할 이유가 훨씬 더 많다.

이지적이지만 냉소적인 후배 하나는 도대체 이 험한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어서 겁도 없이 아이를 낳느냐고 질책 아닌 질책을 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일이야말로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라고 믿는 나는 그녀의 강파른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희망이 있어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기 위해 아이가 태어난다고.

아메리카 인디언 샤이엔족에게는 이런 속담이 있다. “어느 부족도 패망하지 않는다, 그 여인네들의 용기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는. 제아무리 용맹한 전사들과 훌륭한 무기가 있다 한들, 여인네들이 용기를 잃은 부족은 패망을 면치 못한다.”

여성들에게는 용기가, 그 용기를 지탱할 희망이 필요하다. 당당한 어머니가 되는 용기, 성숙한 인간으로 사는 희망.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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