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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2.12(일) 20:06

어쨌거나 우리는 진보한다


얼마 전 ‘2004연극열전’에 선정된 연극 한 편을 보았다. 명동 시대 이후 문학과 음악과 미술과 무용과 연극은 뿔뿔이 각자의 작업실로 흩어져 교류는커녕 조우조차 못하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예술의 어머니 아래 이부형제 같은 그들의 작품을 보노라면 마음이 시큰하다. 돈이 되지 않고 때로 지루해서라도 예술이다. 쌩쌩 휙휙 달려가는 시대의 발 아래 그림자처럼 초라하게 밟히지만 예술이다. 그 예술마저 사라진 곳이 바로 지옥의 가장 밑바닥이리라.

연극은 재미있었다. 15년간 연장 공연된 대한민국 대표 연극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았다. 무대에서 배우들이 뿜어내는 긍정적인 에너지에 동화되어 한바탕 난장이 끝날 무렵엔 살고 싶다는 의지가 불끈 치솟을 정도였다. 하지만 연극을 보는 내 마음에 뾰족하게 솟는 가시 하나가 있었으니, 도무지 그 존재의 필연성을 알 수 없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녀의 직업은 다방 마담, 그러니 찢어진 드레스 사이로 번쩍번쩍 드러나는 희멀건 허벅지와 과장된 엉덩이짓에 박장대소 해야 옳을 것인가? 길가에 핀 꽃 노류장화라, 이 놈 저 놈 아무에게나 이리저리 주물리고 농락당하는 모습을 해학이고 풍류라 말할 것인가?

연극이 끝나고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며 집에 돌아오는 내내 나는 그 쓰디쓴 웃음의 뒤끝을 곱씹었다. ‘파격적인 실험극’으로 15년을 장기 공연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각색이 되고 인물 설정이 바뀌는 것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텔레비전과 영화, 휘황하게 눈과 귀를 사로잡는 유와 경쟁을 하자니 선정적인 장면도 불가피했으리라. 하지만 굳이 다방 마담을 성희롱하지 않고도 충분히 재미있고 감동적일 연극을 불쾌한 소극으로 만들고야 만 이유는 어떤 강박 혹은 안일함 때문일까.

나는 한동안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에 홀로 사로잡혀, 내가 ‘진보’인가 ‘보수’인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좌파라 불리는 것들이 좌파가 될 수 없고 우파라 불리는 것들이 진짜 우파 근처에도 못 가는 홍길동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에서, 나는 정말 차츰차츰 나아지거나 나아가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현실이 될 수 없는 이상과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도덕, 균형을 잃고 절룩거리는 불구의 가치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가장 나쁜 상태에까지 나를 몰고 갔다.

그런데 문득 생각한 것이다. 몇 년 전 내가 그 연극을 보았더라면 나는 다방 마담의 요염한 자태 너머 희번득이는 우리 사회의 음란한 눈을 깨닫지 못했을 테다. 누드보다 포르노보다 더 음탕하고 난잡한 ‘권력과 지배의 도구’로서의 성(性)에 나 자신이 농락당하는 모욕감을 느끼지 못했을 테다. 미처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것들은 무수히 많다. “학내의 종교자유를 보장하라”며 법정투쟁과 단식시위를 불사한 강의석군이 아니었다면, 8학기 중 4학기 동안 ‘채플’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하면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갖지 못했던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테다. ‘민주주의’와 ‘평화’를 외치면서도 성폭력을 외면하고, 교련수업 반대시위를 하면서도 채플은 대리출석 시키기에 바빴던 그때에 비하면, 어쨌거나 나는 진보했다. 비로소 여성이자 비종교인이자 본연의 모습으로 내 권리와 자유를 의식하게 된 것이다.

4년째 요가를 수행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 몸을 함부로 다루고 게으르게 살 때는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쉽게 눈치 챌 수 없다. 견디다 못한 몸이 마침내 비명을 지를 때에야 허겁지겁 병원에 가보면 이미 병세는 악화되어 있다. 그런데 매일 돌보고 살핀 몸은 점점 예민해진다. 절기가 어떻게 바뀌는지, 해로운 환경과 스트레스는 어떻게 작용하는지, 자연 속의 작은 자연인 내 몸이 먼저 반응한다. 빨리 아프고 더 날카롭게 아픈 것이 건강한 것이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라도 쉽게 타협하고 화해하지 말아야 한다. 혼란과 쟁투 속에서도, 어쨌거나 우리는 진보하고 있으니.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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