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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2.05(일) 18:43

부안 사람들과 희망의 기호


“우리가 방패가 있어,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어. 그렁게 첫째, 우리는 많이 모이는 것이 힘이여. 둘째, 우리는 암것두 몰랐잖아, 허지만 인제 우리는 다 알아,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입을 벌리게 됐어, 입이 뚱그러져서 할 말도 하고 욕도 하고 개소리도 해보자고. 첫째는 하늘이 알고, 둘째는 땅이 알고, 셋째는 인간이 알아서 일은 하는 거야. 그런데 우리가 모를 줄 알고, 개 똥구녁 같으니, 한심하고 불쌍혀다. 우리 여자덜, 무기 하나 있어, 벗기라도 다 혀, 무기가 뭔지 알 것지라? 글고 우리가 뭐 땜시 근심혀, 그럴 필요 없어, 데모 죽도록 할 것여, 몇 십년이라도 혀. 그래서 우리 중생덜에게 새끼덜에게 잘 물려줄 책임이 있어, 그걸 우리가 하고 죽어야지. 헌디 우리 놀고 뛰고 놀아감서 허게, 우리 웃어가면서 춤춰가면서 싸우게….”

작년 가을이었을 게다. 여름부터 시작된 싸움은 지칠 줄 몰랐고, 매일 밤 수천 명이 ‘반핵민주광장’에 모인 촛불시위는 만민공동회의 해방공간을 창출했다. 몇 권의 책을 쓸 수 있을 만큼 촛불시위는 대서사시를 기록해왔다. 특히 몇몇 여성들은 특유의 가시돋친 욕설과 해학과 풍자의 민담으로 고통과 분노에 휩싸인 군민들을 자지러지게 하면서 명연설가로 등장했는데, 앞에 인용한 말은 그중 소를 팔아 투쟁기금을 냈다 하여 ‘소할머니’로 유명해진 어느 할머니가 그 당시 촛불시위 때 한 연설이다. 그렇게 질기게 싸우는 부안 사람들 앞에서, 혹세무민이랍시고 주민들을 엄청난 돈으로 매수하려던 한국수력원자력도, 참여정부랍시고 무자비한 국가폭력을 참여시키던 국가권력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무모하되 용기 없고 쫀쫀하다. 아무 죄도 없는 부안 사람들을 그토록 욕보였고 민의를 거스르면서 밀어붙일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다면, 깨끗하게 항복선언을 하여 결자해지하는 것이 정부로서 도리 아닌가. 정부는 부안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일방적으로 ‘부안은 예비신청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궁색한 장치까지 ‘발명’하여 핵폐기장 추진 일정을 마련했다. 그러나 단 한군데서도 유치 예비신청을 하지 않았고, 그 바람에 부안에서도 주민투표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고백’을 산업자원부 장관이 하기에 이르렀으며, 정부가 본신청 마감날로 고지한 11월30일이 지나면서 정부 일정은 자동 무산되었다. 예비신청한 것으로 간주된 부안마저도 법적 시효가 완전히 종료된 것이다. 쫀쫀한 정부는 부안의 ‘예비신청’을 ‘자연사’시키며 발뺌하고 있으나 다름 아니라 부안 군민들을 ‘질식사’시키겠다는 것 아닌가. (실제로 지난 9월초 분에 못이겨 한 아주머니가 자살하였다). 이에 맞서 반핵부안대책위는 12월1일 ‘부안군민 승리대회’ 행사를 통해 정부로 하여금 더 이상 부안에서 어떤 짓도 못하도록 쐐기를 박았다.

17개월의 부안 반핵민주항쟁은 이렇게 해서 부안 군민의 승리로 ‘종결’되었는가. 아니다. 아직은 불확실성의 안개가 낀 절반의 승리다. 적어도 정부가 부안을 포기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는 이상, 정부가 어떻게든 어딘가에 핵폐기장을 기어코 짓고 말겠다는 음모를 획책하는 이상, 군민을 모멸한 부안군수가 여전히 군정을 휘두르고 있는 이상, 부안사태의 책임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는 이상, 그리고 상처받은 부안 민초의 인권과 명예가 회복되지 않는 이상 부안의 고통과 외침은 계속될 터이다. 그러나 그 고통과 외침은 ‘소할머니’의 말마따나 웃어가면서 춤춰 싸우는, 투쟁의 학습효과에 힘입어 새로운 삶을 상상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집단적 변신의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희망의 기호이기도 하다. 이 희망의 기호는 핵폐기장을 저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로 사회적 대안을 생성하는 징후다. ‘부안’ 혹은 ‘부안 사람들’이라는 말이 이제 고유명사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보편적 메시지로 소통되기를 기대해본다.

고길섶 문화과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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