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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1.14(일) 21:11

승부차기를 하다


우아한 배덕자 니체를 거칠게 읽어보자면, ‘살아있다는 것’은 곧 ‘평가하는 것’, ‘사람’이란 그래서 ‘평가하는 자’다. 물론 스스로 가치를 확립하고 결정하기 위한 의지의 ‘평가’와 아근바근 네가 일점 덜 받고 내가 일점 더 받기 위해 아귀다툼하는 ‘평가’를 같은 저울에 올려 잴 수는 없을 테다. 하지만 우리의 평가가 니체의 그것보다 더 고상하진 못할 망정 덜 절박한 것은 아니다. 원하는 학교 담벼락에 엿을 붙이고, 교문 앞에서 징과 북을 울리고, 사찰이나 교회에서 백일기도를 바치는 조악한 기복들이 마냥 우습고 한심할 순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살아가기 위해 평가하고 살아내기 위해 평가받는다. 그리하여 피할 수 없다면, 과연 기꺼이 즐길 수 있을까?

연장전 30분의 추가시간까지 지나면 심판은 호각을 불고 공을 회수한다. 각 팀의 감독들은 바빠지고 선수들의 얼굴엔 돌연 싸늘한 긴장감이 감돈다. 골문으로부터 약 11미터, 12야드의 러시안룰렛이라 불리는 축구의 승부차기가 시작된다. 물론 90분의 본 게임과 30분의 연장전 때에 승패가 난다면 지칠 대로 지친 선수들과 슬그머니 귀갓길이 걱정되는 관중들에게 두루 좋은 일이다. 하지만 언제나 산뜻하고 명쾌한 게임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로는 지리멸렬하고 구태의연하고 맥이 축축 빠지는 시합도 있다. 하지만 어떤 내용의 시합이었대도 끝은 하나다. 이기거나, 혹은 지거나.

승부차기가 시작되면 나는 슬그머니 딴전을 피우곤 한다. 선수가 아닌 일개 구경꾼으로서도 극도의 긴장으로 온몸이 굳는 심리전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마음이 조여 몸이 굳으면 어이없는 실축도 예사롭다. 문지기의 전신반응 속도보다 차는 이의 슈팅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힘껏 차기만 하면 아무리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반사 신경이 뛰어난 문지기라도 옆구리로 스치는 공을 막을 수 없다. 공은 들어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못 넣을 수도 있다. 승부차기에서 가장 중요한 자신감, 그 모호하고도 전격적인 마음의 흐름 탓이다.

누군가는 승부차기도 경기의 연장이며 실력이라고 말하고, 잔인한 옛말에는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하다 한다. 하지만 120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의 전력질주, 12년의 빛나는 성장기를 저당 잡힌 지루한 수험준비는 그곳에 없다. 발끝으로 몰고 달린 저마다의 가치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않는다. 경기장엔 백인백색의 꿈 대신 승부에 대한 집착만이 횡행한다. 무조건,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한다. 이건 협박이다. 그런데 우리는 협박에 너무 익숙하다. 대학에 가지 않으면 낙오자가 된다는 협박의 교육, 남을 짓밟고 오르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는 협박의 문화, 정당한 권리의 주장과 민주주의의 요구마저 소요와 교란으로 치부하는 협박의 정치에 아주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기 위한,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해지기 위한 평가는 없다. 천편일률 규격화된 천국으로 목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간다.

사람은 결코 백지 상태로 태어나지 않는다. 모두가 다른 저마다의 밑그림을 가지고 자기만이 할 수 있고 할 수밖에 없는 시합에 나선다. 팔색조처럼 지치지도 않고 바뀌는 입시 제도에 대해선 말할 깜냥도 기력도 없다. 지금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평가를 치를 즈음에는 분명 생뚱맞고 낯선 방식이 또다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변하지 않는 건 이상 한파가 아니더라도 차갑게 얼어붙는 수험생과 가족들의 마음, 어쩌면 내가 겪은 십여 년 전과 어느 하나 다를 바 없는 대학입시 전쟁의 살풍경뿐일지도 모른다. 언제쯤 유황불이 돋는 지옥이라도 스스로의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갈 수 있을까.

아,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마침내 승부차기로 승패가 갈리더라도, 결국 승부차기란 무승부로 기록된다는 사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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