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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9.08(수) 18:24

빨간색 강박증


△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지난 7일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동참을 호소하며 원로 교사들이 쏟아놓은 참회의 육성은 가슴을 때린다.

그들은 군사독재시절 ‘때려잡자 공산당’ 따위의 맹목적 반공교육을 실시하는 게 진정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것인줄 알았다며 그렇게 학생들의 인격을 파괴하고 이성을 말살하는 반민족, 반통일 교육을 강요했던 자신들의 과거가 부끄럽다고 고백한다. 그 참회록의 한가운데엔 학생과 선생이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었던 국가보안법이라는 괴물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과장된 공포 ‘병적 의식’몰두

국가보안법으로 처벌을 받았던 정해숙씨는 “국가보안법이 악법인 이유는 고문이나 징역같은 한 피해자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그 법이 우리 사회를 온통 불신과 공포, 비겁함과 거짓으로 가득차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재의 국가보안법을 단 한줄도 고칠 수 없다는 국회의원에서부터 예전 같으면 사형 선고도 가능했던 송두율 교수 같은 사람이 집행유예로 풀려날 만큼 현 정부의 국가보안법 적용이 무력화됐다고 주장하는 일부 수구언론까지 보안법 폐지 반대론자들의 목소리는 집요하고 완강하다.

내가 보기에 사생결단으로 보안법 수호를 외치는 이들의 심리적 근간은 ‘레드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란 다르게 표현하면 절대적인 편견이다. 그들의 일반적 정서는 과장된 두려움과 부풀려진 걱정이다.

콤플렉스는 사람의 감정에 깊은 상흔을 남기는 하나의 원초적 사건을 핵으로 형성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사한 심리적 내용들을 집합시키고 연결시키는 배열력을 발휘한다. 강력한 자석 주위에 광범위한 자장이 형성되는 것과 비슷하다. 레드 콤플렉스를 유발시킨 원초적 사건은 한국전쟁이지만 사람들은 빨간색과 연관된 모든 일에 과민해 진다. 콤플렉스는 강박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게 하고,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며, 무엇인가를 두려워 하게 하고,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 잡히게 하는 특성이 있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레드 콤플렉스에서도 그런 특성은 여지없이 발휘된다.

보안법 집착도 ‘주술적 신념’

국가보안법 존속을 주장하는 이들 중 일부는 빨갱이에 대한 단순 공포증세를 넘어 강박증 수준의 빨갱이 공포를 보인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높은 곳을 피하면 그만인 것처럼 단순공포증 환자는 공포를 유발하는 대상을 피함으로써 공포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공포감을 동반한 강박증 환자는 공포를 없애기 위해 일종의 ‘의식’에 몰두한다. 예를들어 에이즈에 대한 공포를 가진 강박증 환자는 에이즈균에 감염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 때문에 하루에 수십번씩 몸을 박박 씻는 상징적인 ‘의식’을 거행한다. 그들은 단지 에이즈 환자와 성관계를 하지 않는 구체적 행동만으로는 자신의 공포를 극복할 수가 없다고 느낀다. 공포의 대상이 외적인 실체가 아니라 주관적이고도 심리적인 무엇이기 때문이다. 빨간색에 대한 강박증이 있는 이들에게 국가보안법은 내적 공포가 엄습할 때면 꺼내들어야 할 병적인 ‘의식’인 것 처럼 보인다. 이러한 ‘의식’은 순간의 공포를 줄이는 역할은 하지만 몸을 씻다보면 하루해가 저문다는 강박증 환자처럼 우리의 일상을 비정상적으로 만든다.

국가보안법이 제정될 당시 법무부 장관의 말처럼 국가보안법은 ‘비상시기의 비상조처’였다. 그런 한시적 성격의 법률을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 56년간이나 지속한 것도 모자라 미래에도 온몸을 바쳐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것은 에이즈에 대한 심리적 공포를 몸을 씻는 물리적 행위로 막으려는 주술적 신념과 다르지 않다. 7차례의 개정을 거쳤다지만 그것은 단물이 빠진 껌을 벽에 붙였다가 다시 떼어서 입에 넣고 씹는 일처럼 추레하고 부적절해 보인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에 ‘올인’하는 듯한 이들의 행태를 정치적 관점이 아니라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강박적 행동의 일종으로 해석하게 된다. 폐기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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