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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8.29(일) 17:24

오빠 믿지?


지난 토요일 이라크 파병부대인 자이툰 부대가 비밀리에 서울공항을 출발했다. 시민사회단체 회원 수백명은 새벽부터 공항 앞에서 파병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를 벌였다. 선발대 파병 당시와 비슷한 풍경이다. 나는 파병저지 무산에 대한 허탈함보다 이라크로 떠나는 젊은 군인들의 복잡한 심경을 헤아리며 착잡하다. 파병 자원자들이라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을 전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까지 온전히 통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전사이기 앞서 바로 우리중 누군가의 아들과 동생, 조카들이다. 우호적인 환송인파 속에 길을 떠나도 자기 선택에 대한 불안을 떨치기 어려운 판에 ‘도둑 파병’이라는 비난을 뒤로한 채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들의 마음이 편할리 없다. 그곳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더 그렇다.

지난 7월말 자이툰 부대가 머물 주둔지를 건설하기 위해 일단의 한국군이 아르빌에 도착했다. 그들은 섭씨 45도가 넘는 폭염속에 방탄조끼와 헬멧으로 무장하고 에어컨도 없는 차를 타고 2박3일간 7백㎞가 넘는 길을 이동했다. 이라크 군관계자는 이 수송작전을 기적이라고 말했단다. 언제 저항세력의 기습이 있을지 모르는 지뢰밭같은 상황에서 육로를 통한 대이동은 이라크의 현 상황에서 천운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곳을 향해 떠나는 젊은 군인들에게 다독거림의 눈길 한번 주지 못하고 파병저지 시위를 벌여야 하는 사람들 또한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상황을 강요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얄밉고 동맹관계 운운하며 파병을 강행하는 우리 정부의 어리석음이 안타깝다. 이라크 파병문제에 관한한 미국과 대한민국의 모습은 80년대 서울 근교의 백마같은 곳에서 젊은 남녀가 벌이던 우스꽝스러운 상황의 재연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기차가 끊어진 시각, 허름한 여관의 불빛 앞에서 옥신각신하던 남자가 결정적 순간에 여자에게 날리는 그 전설같은 대사. “오빠 믿지?” 망설이던 여자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오빠의 다짐을 받아내는 장면까지 이어지면 금상첨화다.

미국이 한국의 정책결정권자들을 향해 취하는 제스처는 ‘오빠믿지?’의 구도와 완벽하게 닮았다. 거의 모든 퇴로를 차단해 놓고 결말이 뻔한 선택을 강요하는 신파와 야비를 겸비한 남자. 이런 경우 최근 개봉된 한국 영화 속의 신세대 여배우는 오빠에게 등을 돌리며 “지랄을 하세요”라고 읊조리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꼭 나를 지켜줘야 해요’라면서 어차피 아무 소용없는 다짐을 반복하며 한술 더 뜬다. 그 상황의 부조리함을 지적하는 이들을 향해서 ‘오빠가 내게 해준 귓속 얘기를 너희들이 몰라서 그렇지 알면 믿을거다’는 식의 반응이다.

‘오빠믿지 신파극‘의 1차적 책임은 물론 후진 오빠에게 있다. 애초에 신뢰를 주지 못했거나 상대방을 설득할 논리나 방법이 없을 때 동원되는 대사가 바로 ‘오빠믿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너무 본질적인 질문이라서 아마도 일생에 한 두 번 할 기회가 있을까, 대부분의 경우 코미디 대사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렇게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신파적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진지한 얼굴로 오빠의 말을 경청하고 고민하고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여자도 책임을 면하긴 어렵다.

염세주의에 빠진 남자가 ‘오빠믿지’ 화법으로 애인을 설득해 같이 죽자며 강물에 들어가다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돌아나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알 길이 없었던 여자는 목숨을 잃었다. 자기 문제에 주도적이지 않았던 사람은 달라진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처를 하기가 어렵다.

전쟁을 결정한 미국 의회조차 이라크전을 ‘거짓과 과장에 의한 전쟁’으로 규정했고 부시 미 대통령은 전후 이라크 상황에 대해서 오판이 있었음을 처음으로 시인했지만 한국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빠 마음도 흔들리는 판국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독립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마땅하다. 자이툰 부대의 비밀파병은 권영길 의원 말처럼 ‘비극적 코미디’다. 올 가을 국회의 ‘파병기간 연장동의안’의 부결을 간절히 바란다.

정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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