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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7.11(일) 17:46

국민을 학대하는 나라


상담실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사례의 하나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이들이 털어놓는 마음의 상처다. 그들은 잘난 형제들 틈에서 혹은 또다른 이유로 부모로부터 심리적, 물리적으로 학대에 가까운 대우를 받으며 성장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부모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모질고도 깊다. 부모에 대한 이들의 정성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 이들은 중년에 이르러서도 부모의 칭찬 한마디에 감읍한다. 인간에게는 결핍을 채우려는 본능적 욕망이 있어서 결핍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 관계에 더욱 집착하기 때문이다. 부모, 자식처럼 대체할 수 없는 관계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어릴 때 많이 혼난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속설은 그런 면에서 일정부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상담실에서 만나게 되는 이런 사례는 건강한 의미에서의 효가 아니다. 대체 불가능한 관계에서 심리적 학대를 당한 이들이 어떻게든 결핍감을 보상받기 위한 병적인 집착의 한 형태이다.

나는 김선일씨 피살사태를 보며, 혹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국민을 학대함으로 해서 결과적으로 국가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유발하는 나라가 아닌가 하는, 직업병적 의혹에 휩싸인다. 그 많은 이들의 경악과 호소와 절규와 당부. 하지만 국민의 무고한 생명이 스러져가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보여준 행태는 혹독하다 못해 끔찍하다. 국민을 대상으로 한 명백한 학대행위다. 그런 학대행위의 한 정점에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발언이 있다.

“김선일씨 피랍 사실이 알려진 직후 소집돼 대책을 논의한 당정회의에서 우리는 주저없이 그런 결론(추가파병 방침 재확인)을 내렸으며, 앞으로 유사한 상황이 벌어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 현지에서 한-미 동맹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외교적 발언이었다는 해명은 궁색하다. 나는 ‘주저없이’ 그런 결정을 또 내리겠다는 신의장의 말에 전율을 느낀다. ‘주저없는’ 그 결정으로 무고한 국민이 죽었다고 판단된다. 그 사실을 신 의장도 알고 국민들도 안다. 그럼에도 그는 ‘무도한 테러분자들의 협박에 굴복하는 것은 국가적 자존심을 버리는 태도’라며 단호한 결단을 강조한다. 영화를 찍어도 인질범이 인질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최소한 무기를 내려 놓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방법을 찾아야 보기에 그럴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공의 터프함을 과장하려는 3류 액션극이 되거나 무고한 생명의 희생에는 아랑곳없이 국가의 비장미만을 강조하는 할리우드식 4류 상황극이 되기 십상이다. 김선일씨 사태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은 대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3류, 4류 영화를 빼다 박았다.

국가 관리자들 처지에서는 짜증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왜들 이 난리인가. 외교부의 한 관리는 국민들의 무수한 질타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지만 그럼 국민들은 어디에다 대고 말을 해야 하는가. 테러단체에 직접 따져물어야 하는가.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국가를 선택할 수 없다. 국민에게 국가란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그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우리를 학대하듯 방기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핍감을 채우기 위해 계속 국가라는 존재에 매달려 애국을 외치면서 관심과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여 달라고 애걸해야 하는가, 아님 국가는 대체 불가능하지만 국가를 관리하는 세력은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위안삼아 무기력하게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

내가 보기에 오랜 세월 대한민국은 국민들의 결핍감을 증폭시켜 병적인 애국심을 얻어왔던 나라였다. 나는 그런 시대가 오래전에 끝난 줄 알았다. 하물며 살려달라는 국민의 절규조차를 무시해버릴 만큼 가혹한 나라일 것이라고는, 또 그래놓고도 ‘단호한 결단’ 운운할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다. 국가를 관리하는 이들에게 묻는다. 도대체 우리에게 왜 이러는가. 우리는 이제 그만 학대와 집착의 병적인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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