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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5.09(일) 18:00

‘들러리 이데올로기’


얼마 전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일행이 한 복지시설에서 ‘악의 없이’ 보여준 행태는 기막히다. 그들은 서른살의 정신지체 장애인을 알몸 상태로 목욕시키며 이를 취재진에게 공개했고 그 장면은 텔레비전 뉴스와 인터넷 신문을 통해 여과없이 보도되었다. 어린아이의 지각수준을 가졌다지만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양 다리를 번쩍 치켜 들린 채 벌거벗은 몸으로 카메라를 향하고 있는 중증 장애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전신마취가 잘못돼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물론 집도의들은 그가 마취상태에 있는 줄 알았다) 복부 절개 수술을 받았다는 어떤 이의 지옥같은 경험담을 떠올린다. 그 엽기적 ‘목욕 봉사’의 1차적 책임은 그런 상황을 자처하고 방치한 정 의장에게 있을 터이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열린우리당 관계자들, 복지시설 관계자들 그리고 문제의식 없이 현장을 중계한 기자들, 그 무리 모두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거의 인격살인이라 할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서 대통령 탄핵 가결 때 열린우리당 의원이 그랬던 것처럼 ‘이건 아니야’라고 외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장애인 문제를 떠나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일이 일상화된 듯한 그 ‘무리들’의 집단적 무신경과 부주의는 경악의 수준이다.

어떻게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나는 ‘들러리 이데올로기’가 그 원인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들러리 이데올로기’란 권력자 측근들의 처지에서는 자기 보스를 제외한 이 세상 모든 것이 들러리로 인식되는 그런 사고방식이다. 형님의 노래를 빛내기 위해 주위 시선에 아랑곳없이 웃통을 벗고 형님을 무동태운 채 단란주점을 휘젓는 조폭의 행동 같은 것이다.

보육원이나 양로원 앞에 라면 상자나 쌀가마를 쌓아놓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그뿐인가. ‘각하가 곧 국가’인 시대에 우리는 쏜살같이 지나가는 각하의 차량 행렬을 위해 서너시간씩 뙤약볕에 서 있었고, 국민은 늘상 각하의 들러리로만 존재하였다. 〈효자동 이발사〉 같은 영화는 그 치욕스럽고 회한에 찬 들러리의 세월을 우화의 형식으로 들려주니 그나마 착잡함이라도 덜하지만 대명천지에 아직도 기승을 부리는 ‘들러리 이데올로기’는 참담하다. 정 의장을 도와 장애인을 목욕시키던 초선의 당선자는 정 의장이 자신의 머리를 감을 때보다 더 잘 감겨 준다고 추어 올리더니 마침내 “제일 유명한 분한테 너 머리 감는다”는 어이없는 멘트를 날린다. 좋은 학력과 시민운동 등 더할 나위 없는 이력을 가진 이 당선자를 개인적으로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의 ‘들러리 이데올로기’는 보기에 딱하다.

그 당선자는 언젠가 자신의 글에서 ‘샤워를 할 때면 발가벗은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며 모진 세파에 당당했는지, 혹여 세상의 부조리한 힘과 권력적 유혹에 휘둘리지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본다’고 했다. 하지만 그도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공개석상에서 발가벗은 채 자기성찰을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들러리 이데올로기’는 독재 시절의 문제 혹은 한 개인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지금, 우리들’에게 집단무의식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런 충격적인 일이 ‘악의 없이, 무심하게, 일상적으로’ 나타난다.

반전주의자들은 폭력은 폭력의 피해자를 사물로 뒤바꿔 버리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들러리 이데올로기 같은 심리적 폭력에도 그 명제는 똑같이 유효하다. 정 의장의 목욕봉사가 있던 날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자신의 팬클럽 회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또 어떤가. 행사 마지막에 박 대표와 함께 아이들을 앞세워 사진을 찍던 중 아이들이 주최 쪽의 의도대로 밝은 표정을 짓지 못하자 결국 그들은 유난히 표정이 굳어 있는 한 아이를 향해 “쟤는 빼”라고 말한다. 권력자 측근의 ‘들러리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면 본의 아니게 지옥을 경험하는 개인들이 생겨난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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