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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2.15(일) 18:36

한줌 실행자


살다 보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이 ‘국민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불가사의한 경우를 적지 않게 경험한다. 그 반대로 모든 사람이 간절히 소망하는 일임에도 ‘형평’이라는 미명 아래 대의가 훼손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 경계를 가르는 기준은 전적으로 의사결정권자의 태도에 달려 있다.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비록 수적으로는 한줌에 불과하지만 그 힘은 수백만 명의 의견을 압도할 만큼 강력하다. 일종의 ‘한줌 실행의 법칙’이라고 할까.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안’은 ‘한줌 실행의 법칙’이 현실에서 얼마나 막강한 위력이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거의 모든 국민은 이 특별법 제정에 전폭적 지지를 보내고 있으며 입법 당사자인 국회의원들도 155명이나 서명을 했다. 통과되지 않을 이유가 조금도 없어 보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과거사 특별위원회에서 법안을 만들어 법사위원회에 보냈으나 반민족행위 대상이 너무 광범위하다며 반려되자 과거사 특위는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간절한 마음에 수정 의견을 부적절할 정도로 모두 수용하여 다시 상정했다. 하지만 관련 대상자, 즉 친일행위자의 후손들이 반발해 국민적 갈등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시간을 끌다 지금은 본회의 상정조차 못 해보고 법안 자체가 자동 폐기될 위기에 놓여 있다.

내가 보기에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의 핵심에는 한나라당 김용균 의원이 있는 듯하다. 그는 친일 진상규명 특별법을 다루고 있는 국회 법사위원회 제2법안심사소위 위원장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김 의원의 실명을 거론하며 그가 진상규명 기구의 권한을 대폭 제한하거나 축소한 채 통과시켰으며, 통과를 극렬히 반대해 결국 이 법안의 통과를 방해했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지난주 한 텔레비전 시사프로그램은 친일반민족 특별법안과 관련된 김 의원의 속마음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고쳤더라도 이 법 통과시켜 가지고 (국회의원들이) 욕 얼마나 얻어먹겠는가 이런 짓을 우리 국회가 왜 해야 되느냐 60년이나 지난 세월의 일을. 왜 하필 우리가 이런 역사적 멍에를 지느냐 말이지.” 서울대 법대를 나와 조지워싱턴대 법학박사인 김 의원이 나름의 법 논리도 없이 무턱대고 특별법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태도는 전형적으로 결정권을 가진 ‘한줌 실행자’의 ‘니들이 뭐라든 나는 상관 안해’주의다. 그가 친일규명 법안을 위원장의 힘으로 반려한 것은 국회가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드는 예산을 전액 삭감한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열하루 만에 5억원을 모금한 직후였다. 그의 ‘상관 안해’주의는 초지일관이다. 서청원 의원 석방 요구 결의안 가결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센 와중에도, 당시 결의안에 서명했던 그는 “국회의원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회기 중에는 구속된 국회의원을 모두 석방해야 한다”고 담대한 주장을 펼친다.

김용균이라는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친일 관련 특별법과 관련해 ‘한줌 실행자’로서 그의 힘은 수천만 국민의 소망을 단숨에 무너뜨릴 만큼 파괴적이다. 내가 특별히 김용균이라는 특정 의원에게 말화살을 날리는 것은 대의명분에 앞서, 그가 주도하던 소위원회의 한 장면이 마음에 걸려서다. 친일 관련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이 행정자치부 차관과 이견이 생겨 언성이 높아지자 김용균 위원장은 기다렸다는 듯 “이런 식으로 ‘뗑깡’을 놓으면 회의 안 하겠어”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이 법안을 주도한 김희선 의원은 다급하게 “위원장님, 위원장님”을 외쳤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독립군의 딸로 태어난 죄로 온갖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그가 도대체 왜 “안 해! 못 해!”를 내뱉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리는 위원장 김용균의 등 뒤에서 애처로울 정도로 “위원장님 잠깐만”을 외쳐야 하는지 기막혔다. 더 강력한 ‘한줌 실행자’의 횡포 앞에 발을 동동 구르는 그의 모습이 가슴 아팠다. 아무 제동장치 없이 ‘한줌 실행의 법칙’이 강력하게 작동할 때 우리에게는 물갈이나 판갈이라는 말이 더없이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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