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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3.12.21(일) 18:52

노무현 화법


개인적 정치 성향과는 별개로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차원이 다른 인간형’으로 생각한다. 그가 대통령 자리에 올라서가 아니다. 놀랄 만큼 정교한 논리적 사고, 그와 배치되는 듯한 열린 감성, 기존 사고의 틀을 뒤집어엎는 혁신적 발상과 인본주의 가치관 등 지난 대선 기간중 압축적으로 드러난 그의 통찰력과 행동력은 단연 발군이었다. 나는 지금 노비어천가를 부르자는 것인가. 아니다. 본론은 지금부터 하는 얘기다. 나는 근자에 쉼없이 제기되는 ‘노무현 화법’에 대한 논란을 보면서 ‘차원이 다르다’는 의미를 되새김질한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자기’를 놓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점에선 분명 ‘차원이 다른’ 기본기를 갖춘 듯하지만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페르소나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치인이었던 예전과 똑같다. 대미관계에서만 상황논리를 들먹일 뿐 여타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노무현이다’는 식의 화법으로 일관하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 노무현 화법을 관통하는 열쇠말은 ‘솔직과 강조’다. 청와대 한 참모의 말처럼 노 대통령은 아는 것은 다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자신에 대한 양심의 부담 때문에 전격적으로 재신임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고 농반 진반으로 대통령 못 해먹겠다는 고백을 하기도 한다. 그 자신은 속마음을 툭툭 털어놓아 홀가분하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은 좀 다르다. 자기 노출 수위가 턱없이 높고 느닷없어서 감당하기 힘들다. 주식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상대가 갑자기 자신의 간질 병력을 얘기하는 것처럼 부적절하다. 지나친 솔직함의 부작용이다. 그는 대통령을 흔들어 대는 현실상황을 탓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노무현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없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아직도 변방의 힘없는 정치인처럼 자신을 규정한다. 그런 상황인식이 개인적 성향과 맞물려 노 대통령의 말은 필요 이상으로 강해지고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다.

그가 즐겨 쓰는 강조화법이 바로 그렇다. 한참 사랑의 열병에 빠져 있는 연인이 “당신이 변심하면 나는 죽어버릴 테야”라고 말할 경우 그것은 내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 어법이겠지만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은 섬뜩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대선자금과 관련한 정계은퇴 발언에 대해 명확한 사실과 증거를 가지고 공방하자는 강조화법인데 진의가 왜곡되었다고 해명한다.

그의 솔직화법과 강조화법이 시중의 화제가 될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메뉴는 보수언론의 비틀리고 부풀려진 보도 행태다. 그의 언론관에 흔쾌히 동의하지만 노무현 화법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와 별개의 문제다. 노 대통령의 말을 문제삼을 경우 보수언론의 의도적 왜곡에 생각없이 휩쓸린다고 비난하거나 그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말이다.

직업에 따라 개인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기 일쑤인 현실세계에서 대통령이 된 뒤에도 자연인 노무현의 정체성이 압도적인 그의 행보는 또다른 의미에서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직업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규범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 규범이 개인의 가치관이나 성향에 우선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5월 경호 시범을 참관한 노 대통령은 평소 위험 앞에서도 초연하고 당당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서 돌발상황시에 바닥에 엎드리는 행동을 비겁하게 생각했는데 새삼 대통령이란 자리의 중요성을 깨달아 앞으로는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새우처럼 납작 엎드리겠다고 말했다. 같은 이유로 나는 노 대통령이 토론과 설득을 선호하는 개인적 성향에 우선해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말을 줄였으면 좋겠다. 개혁 피로감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라도 있지만 말에 의한 피로감은 견디기 어렵다. 나는 노 대통령 스스로 ‘내가 요즘 말을 너무 안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깝게 생각되더라도 꼭 그러시길 바란다. 하루종일 진료실에 앉아 사람의 말을 듣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온 한 정신과 의사의 애정 어린 조언이다.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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