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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4.25(일) 18:11

낙선자들을 위하여


지난 총선 기간, 한창 선거운동이 달아오른 4월10일 토요일 오후, 인천민예총에서는 조촐한 행사를 준비했다. 회원들이 ‘깨끗한 돈’을 거둬 새로운 공간을 마련한 것을 축하하는 간소한 입주식이다. 정부나 시 정부에서 받아야 할 지원은 거절할 필요가 없지만 그저 그쪽만 바라보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그러니 반가운 얼굴들이 오순도순 모여 우리 손으로 새 공간을 마련한 대견함을 자축하는 모양이 화창한 날씨만큼 따사로웠던 것이다.

인천민예총에서는 내게 그 공간의 이름을 지으라는 명예까지 부여했다. 이 책 저 책을 뒤지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 이규보의 〈망해지〉(望海誌)를 찬찬히 다시 보게 되었다. 고려 일대를 울린 큰 문인 이규보가 부평 원님으로 구실살 때 남긴 짧은 산문인데 가히 명문이다. 조정에서 쫓겨나 부평으로 좌천되자 이규보는 낙심천만이었다. 한면만을 빼고 삼면이 물에 둘러싸인 부평에 들어서면서 그는 마치 외로운 섬에 갇힌 듯 우울했다. 지금은 부평에서 계양산에나 올라야 바다가 보이지만 그때는 바다가 훨씬 내륙으로 다가들었던 모양이다. 요즘도 인천의 해안선은 매립의 진행과 함께 바다로 한없이 도망가는 형국이어서 고려시대의 해안선이 크게 다르리라고 짐작은 해도 인천의 내륙인 부평지역이 당시에는 거의 바다에 둘러싸여 있었다니 신기한 일이다. 이렇게 외로운 섬의 침울한 구실살이를 마지못해 이어가는 중, 개경에서 올라오라는 명을 받는다. 다시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이후로는 마음이 가벼워 그처럼 미워하던 물을 보러 부평의 곳곳을 신바람나게 찾아나선다. 그는 기쁘게 바다에 매혹된다. 인주(지금의 인천)와 통진(지금의 김포) 쪽을 바라보며 바다의 천변만화에 몸과 마음을 맡기다가 문득 반성한다. “물도 지난번의 물이요 마음도 지난번의 마음인데, 그때는 보기 싫던 물을 지금은 도리어 즐겨 구경하니, 혹시 한 구구한 벼슬을 얻었기 때문인가 마음은 내 것이로되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여 때에 따라 바뀌기를 이와 같이 하니, 죽고 사는 것을 한결같이 하고, 얻고 잃는 것을 같이 보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글을 지어 훗날의 경계로 삼는다.” 마음의 눈이 감기면 풍경도 죽고 마음의 눈이 뜨이면 풍경도 살아난다. 마음의 주인이 되어 생사를 하나로 보는 지극한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가 모든 공부의 근본이라는 점을 인상적으로 드러낸 일류의 산문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 공간의 이름을 ‘해시’(海市: 신기루)로 정했다. 이규보가 마음의 눈을 뜨고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바다가 보여주었던 ‘또 다른 세상’, 이 신기루같이 아름다운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꾸는 목숨의 꿈이 아닐까

총선이 끝났다. 세상은 역시 이긴 자들의 것인가 당선자들에게 쏠리는 각광 속에 낙선자들은 한숨에 사라졌다. 물론 주목받는 낙선자들도 없지 않지만 그 주목조차 구차한 것이다. 선거 초반의 좋은 조건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전국정당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린 열린우리당의 미숙이 영남의 민심을 흔드는 머리에 우리가 기대했던 여당 후보들이 안타깝게 낙마했다. 이 현상은 야당들에서도 나타났다. 나쁘지 않은 야당 후보들도 여럿 낙선했다. 물론 17대 총선은 대단한 일을 해냈다. 박정희와 3김정치로부터의 이행을 선언한 탓에 미운 오리새끼처럼 구박받던 우리당이 과반의석 획득에 성공함으로써 명실공히 여당이 되었고,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에 성공하는 한편 일거에 제3당으로 뛰어오름으로써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압살된 죽산의 진보당 전통을 복원할 단초가 마련되었다. 그래도 나는 왠지 안타깝다. 탄핵 가결 직후 어느 간담회에서 우리당이 압승할까 걱정이라고 입방정을 떤 일을 후회한다. 낙선자들에게 충심의 위로를 전하고 싶다. 요즘은 정말 새옹지마를 절감한다. 남 얘기 말고 나부터 마음을 다스려 4·15라는 한 결정적 지점을 통과한 우리 사회의 오늘을 궁구하는 새 공부를 시작할 때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최원식 인하대 문과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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