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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3.12.11(목) 16:40

국치일을 기억하자


8월은 광복절의 달이자 국치절이 든 달이다. 그럼에도 언젠가부터 국치일은 기억하지 않는다. 아니 국치일이란 말 자체를 아예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1910년 8월29일, 우리나라가 일본에 망한 날이라고 하면 ‘아 한-일 합방’ 하고 시큰둥하게 응수하곤 한다. 나는 이 말에 또 부아가 치민다. ‘한-일 합방’처럼 우스운 말은 없다. 한국과 일본이 나라를 합쳤다 마치 한국이 일본과 자발적으로 나라를 합한 양 위장된 이 용어는 이중으로 진실을 왜곡한다. 일본식 민주주의자들이 그 당시에 흔히 썼던, 아니 요즘도 일본에서 심심찮게 사용되는 ‘일-한 합방’이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깝다. 일본이 주체가 되어 한국을 삼킨 것이니까. 이 말을 해방 후 ‘한-일 합방’으로 바꿨으니 정말로 가관인 ‘민족주의’다. 정명(正名:이름을 바루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라는 유가적 사유를 빌리지 않더라도, 허울뿐인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의해 종언을 고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이 사건을 국치로 부르느냐, 한-일 합방으로 부르느냐, 이 호명 사이에 우리 사회의 정치적 선택이 가로놓여 있다.

내 어린 시절에는 분명히 달력에 국치일이 날짜 밑에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던 걸 기억한다.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덜 인상적이었지만 그래도 어렴풋하게 ‘우리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날이로구나’ 하는 일말의 감상을 상기시키곤 하였다. 비록 친일파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음에도 강한 반일을 견지했던 이승만 시대의 미묘한 타협 흔적이다. 달력에서나마 희미하게 존재하던 국치일은 언제 완전히 지워졌을까 아마도 박정희 시대, 특히 1965년 한-일 협정이 비준된 이후 한-일 유착이 강화되면서 그리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 자민당 정권과 강한 고리를 맺은 친일파 장군 박정희의 개발독재 몰이 속에 국치일은 바람결에 날아갔다. 독립운동가들은 고단한 망명지에서 매년 8월29일, 국치일 기념식을 거행하곤 했다. 좋은 일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이들은 나쁜 일을 기념함으로써, 그 나쁨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집단적으로 다짐했던 것이다.

내가 국치일을 그 이름의 회복과 함께 기억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새삼 일본에 대해 단순한 증오를 재생산하자는 것이 물론 아니다. 억압당하는 자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억압하는 자도 그 속에서 왜곡된다. 한반도를 침략함으로써 한반도 분단의 원인제공자로 된 일본의 조숙한 군국주의는 결국 자신에게도 파멸적 영향을 주어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지금도 일본이 여전히 미국의 눈치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 딱한 생각도 든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함께 고통에 몰아넣은 그 악령의 과거로부터 해방되어 한반도와 일본이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로 손잡고 나아가는 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일제교육을 받은 세대에서 나는 묘한 이중성을 목견하곤 한다. 입으로는 반일이로되 몸으로는 반일이 아니다. 반일과 친일이 매개 없이 결합한 이 콤플렉스의 전승 속에서 우리 사회의 기이한 반일감정이 둥지를 틀면서 일본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차단해 왔던 것이다. 대국의 리더십을 행사하지 못하는 일본을 탓하기 전에 피해자인 우리가 먼저 풀자.

국치일의 기억은 궁극은 우리를 위해서다. 왜 우리는 20세기 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는지 냉정하게 자기를 점검해야 한다. 자기 비판력이야말로 문명사회의 잣대다. 이 능력의 결여 또는 부족은 한 사회의 미성숙 또는 쇠락의 징후다. 요즘 우리 사회는 온통 남 탓이다. 여당은 야당에, 야당은 여당에, 정부는 언론에, 언론은 정부에, 시민은 국가에, 국가는 시민에 탓을 돌리느라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할일 많은 나라에서 언제까지 탓만 할 것인지. 이래서야 어찌 자기 비판력의 심각한 결여를 보여주는 조지 부시 미국 정권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국치절과 광복절을 함께 맞는 8월에 나라를 잃었던 고통과 나라를 찾은 환희를 반추하며 새나라 건설의 공동의제를 구축하는 데 중지를 정성스럽게 모을 때가 아닐 수 없다.

최원식 인하대 문과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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