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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이원섭


작가 박완서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란 수필이 한때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리며 사랑을 받았다. 박정희 유신독재 막바지, 민주화와 인간성 회복 요구가 터져나오고 입시 위주 교육, 경쟁만 부추기는 삭막한 사회를 비판하는 시대상황과 맞물려 작가의 따뜻한 눈길이 폭넓은 공감을 자아냈다. 마라톤 경주에서 꼴찌로 달려가는 선수를 보며, 혹시 그가 절망해 주저앉지 않을까 걱정이 돼 손바닥이 붉게 부풀어오를 때까지 박수갈채를 보내는 심정을 잔잔하게 그렸다.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레이스를 중도 사퇴한 김근태 의원의 모습이 여러 사람에게 울림을 주는 것 같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초췌하고 처연한 표정이 사퇴를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번민했을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자신의 뜻을 몰라주는 현실이 너무 야속했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가장 먼저 주창해 `국민참여 경선제'란 멋진 판을 벌여놓지 않았던가.

*정치자금 고백 역풍 맞아*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피해가고 싶은 정치자금 문제를 용기있게 고백한 것이 오히려 선거에서 역풍을 맞는 현실에서 그는 좌절감을 느꼈음 직하다. 초반 레이스지만, 제주·울산 예비선거에서 겨우 26표(1.5%)를 얻었을 뿐이니 더이상 끌고갈 기력을 잃었는지 모른다.

그가 끝까지 간다면 아무리 돈과 조직이 판치는 선거판이라도 최소한 꼴찌란 `창피'는 면했을 터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뒤 장렬히 산화하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도 같다. 그러나 `개혁후보'를 단일화해 정권을 재창출해야 한다는 `대의' 앞에 그는 버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이 김근태의 참모습일 것으로 필자는 믿는다. 1987년 대선 때 김영삼-김대중씨의 분열로 민주화 운동 진영이 갈라지고, 자신도 내키지 않는 선택을 해야 했으며, 그 결과 노태우 정권을 탄생시킨 것을 그는 두고두고 가슴아파했다.

학창시절, 독재권력과의 투쟁, 그리고 민주화의 상징으로 떠오르는 역정을 비교적 가까이서 지켜본 필자는 그가 현실 정치인으로 우뚝 서고 지도자로 비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이번에 놓친데 대한 아쉬움이 크다. 그런 그릇을 큰 정치인으로 키우지 못하는 척박한 풍토가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손실일까 생각해 본다.

정치인으로서의 김근태는 재야 때의 `화려한' 명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정치판에 능숙하게 적응해 세를 불려가기에는 그는 너무 진지하고 정직했다. 적당히 허세도 부리고 눙치기도 해야 하는 정치판 생리를 낯설어하며 가식으로 꾸미기를 부담스러워했다. 절대권력과의 싸움에선 결코 굴복하지 않았지만 `국제신사'란 별명이 말해주듯, 당내의 이권 다툼에선 너무 점잖았다. 싸움닭처럼 집요하게 달려들든 뒷거래를 하든, 여하튼 제 잇속을 챙기는데 그리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치판이 맑아질 때 그에게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을 믿는 사람들은 크게 늘어났다.

*정치판에서의 좌절과 희망*

정치권에 들어간 뒤 올챙이적 생각은 까맣게 잊고 과거 경력과 허명만 훈장처럼 내세우며 추하게 변해가는 사이비 투사들과는 대조적인 길을 그는 걸었다. 그런 용기가 현실의 벽을 당장 깨뜨리지는 못하지만 조금씩 변화시킬 것이란 믿음이 `희망의 근거'가 된다. 우리 주위엔 보수정당에 몸담기를 거부함으로써 김근태 의원처럼 각광을 받을 기회조차 아예 봉쇄당한 채 고집스레 밑바닥을 다지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정의롭게 변혁시키겠다고 묵묵히 제길을 가는, 아직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만한 인사들이 있기에 꿈을 접을 수 없다.

박완서는 꼴찌를 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달리는 마라토너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나는 여지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이십 등, 삼십 등을 초월해서 위대해 보였다. 나는 그가 주저앉는 걸 봄으로써 내가 주저앉고 말듯한 어떤 미신적인 연대감마저 느끼며 실로 열렬하고도 우렁찬 환영을 했다.”

이원섭/ 논설실장 ws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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