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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시간 2000년08월08일18시44분

    한겨레/ 사설·칼럼/ 김근 칼럼
    [김근칼럼] 현실과 이상 사이

    지난 5일자 뉴욕 타임즈가 최근들어 무정부주의가 급속히 대두하고 있다고 보도하여 관심을 끌었다. 사회주의가 패퇴한 뒤 전세계가 자본주의 지배 밑으로 거칠게 내닫으면서, 그 대안을 찾지 못한 이상주의자들이 무정부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무정부주의 그룹이 미국의 주요도시마다 생기고 있다는 것이고,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회의를 격렬히 반대하는 데 그들이 큰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무정부주의와 세계자본주의

    무정부주의가 내거는 것은 모든 기존 권력에 대한 거부와 부정이다. 정부를 비롯한 기존의 조직 규율 등 정치적 지배를 부정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 투쟁을 통해 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이념이다. 무정부주의는 행복하고 자유스러운 삶을 향한 인간의 구원한 이상과 맞닿아 있는 점이 있어, 그 역사 또한 사람이 사회개조에 대해 생각을 품기 시작한 때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만큼 근본적이고 본질적이며, 역사가 길다. 특히 19세기 들어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고 인간의 불행을 양산하자, 무정부주의는 사회압제에 대한 모든 저항적 운동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무정부주의는, 인간의 삶이 뚜렷한 대안없이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상황이 연출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여 그것을 경고하고 거기에 맞서 싸웠다. 그러므로 무정부주의적 이상이 사람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지피는 현실은 우리의 삶이 대안없는 위기로 치닫고 있는 점을 증거하는 것은 아닌가, 깊이 반성해볼 점이 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는 그 순수성 만큼이나 비현실적이므로 성공을 거두기는 어렵다. 무정부주의 운동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걸쳐 공산주의 운동과 다투었으나 패배했다. 내거는 이상은 제쳐두고 그 두 운동은 애초부터 적대적이다. 한쪽이 개인을 내세우면 다른쪽은 계급을 내세우고, 한쪽이 자유를 내세우면 다른쪽은 권위를 내세운다. 또 한쪽이 자유공동체를 지향할 때 다른쪽은 국가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한쪽이 인간의 자발성에 믿음을 가질 때 다른쪽은 강고한 조직에 기반을 둔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두 운동 가운데 어느쪽이 대중적 기반을 통해 성공할 수 있을지는 곧장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압제자들의 압도하는 현실적 권력을 상정할 때, 무정부주의는 압제자들의 권력을 넘어 새로운 인류의 이상을 펼치기에는 어림도없이 순수했다.

    우리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무정부주의가 대두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아울러 비판했었다. 1923년에 나온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은 `민족적' 무정부주의의 대표 문건으로, “조선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세력을 파괴할 뿐인 줄을 알진대···”, “부절하는 폭력-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파하고···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고 다짐했다. 신채호 선생은 민족의 피를 끓게 하는 이 글에서 자치운동, 문화운동, 외교론, 준비론 등을 매섭게 질타했다. 그러면서 무력만을 독립운동의 유일한 수단으로 내세웠다.

    구체적 일상과의 싸움 끝에

    신채호 선생의 선명하고 순수한 투쟁노선은 어정쩡한 타협적 노선을 경계할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진영에 강고한 정신적 호흡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우리가 신채호 선생의 그러한 체취를 오늘 다시 그리워한다 하더라도, 독립의 쟁취가 테러와 단순 폭력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구체적 현실을 두고 식민권력과 여러 방책으로 피를 흘리는 싸움을 한 끝에, 그 성과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날 얻게 되는 것, 그것이 독립의 쟁취일 것이다.

    오늘 다시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언제나 유토피아적 삶을 간구하는 인간의 이상과, 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조악한 현실을 생각해본다.

    논설주간 k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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