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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0.10(일) 21:45

부안의 교훈 잊었나


지난 4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을 노랗게 물들인 것은 은행 잎이 아니라 부안군민들의 반핵모자와 조끼였다. 전어잡이와 가을걷이로 부지깽이도 일손을 거든다는 바쁜 철에 인구 7만의 부안군에서 주민 4천5백여명이 버스 1백여대를 타고 나흘간의 상경투쟁에 나섰다. 삼보일배를 마치고 경찰로부터 방패세례까지 받은 이들은 “제발, 부안의 소리를 들어라”고 외치고 있었다. 무엇이 15달 동안이나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벌이느라 지칠대로 지친 부안주민들을 다시 불러세웠을까.

지난 6월 산업자원부가 여당에 내놓은 한 보고자료를 보면, 부안사태에까지 이르기까지 정부가 지난 18년간 추진한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원전수거물 센터) 터 선정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첫번째 문제점을 “민주적이고 투명한 절차 미확립”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환경단체와 지역주민 등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사전에 폭넓게 수렴하는 민주적 절차보다는 행정력으로 밀어붙이려 했다는 자기반성이다. 지난 9월15일 새로운 절차에 따라 방폐장을 유치하겠다는 예비신청을 한 지자체가 하나도 없자, 이희범 산자부 장관은 이를 “정책전환의 전기로 삼겠다”고 밝혔다. 그는 “지역주민, 시민사회단체 등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투명한 절차를 통하여 원전수거물 관리사업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반성과 약속이 말 잔치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정부가 지역주민과 시민단체로부터 전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부안을 예비신청이 끝난 후보지로 끝내 남겨두려는 정부의 태도가 그 한 이유이다. 부안사태는 김종규 부안군수가 주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낸 유치신청을 정부가 밀고나간 데서 비롯됐다. 바로 정부가 인정한 대로 ‘민주적 절차의 미확립’ 때문이었다. 이제 방폐장 문제를 민주적 절차로 풀겠다면서 부안에서만은 비민주적 절차를 인정하겠다는 건가.

지난 1일 비공개로 열린 방폐장 관계장관회의도 문제다.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과 함께 짓기로 했던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장을 따로 분리해 2008년까지 건설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고, 부안을 그 후보지의 하나로 유지한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용후핵연료는 어쩌자는 건가. 부안이 끝까지 반대하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투명한 절차로 국민의 공감을 얻겠다던 약속은 한 달도 되기 전에 빈말이 돼 버렸다. 부안에선 벌써부터 “중·저준위 핵시설을 앉힌 다음 고준위도 앉히려는 기만책”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밀실행정은 불신을 낳을 뿐이다.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원자력 논란을 풀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토론과 의견을 모으는 절차에 시간과 돈이 든다. 보수언론은 ‘사회적 합의’란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이들은 정부가 무능력해서 공신력이 깨어졌다느니, 시민단체에 끌려다니다 핵쓰레기가 포화되면 어쩌냐는 근거 없고 무책임한 비난을 퍼붓고 있다. 지난 18년간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또다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란 말인가. 민주주의가 발달한 영국이나 독일에서조차 방폐장 건설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구하는데 5~10년의 시간과 막대한 비용을 들이고 있다. 지역주민과 국민의 동의와 이해 없이는 방폐장은 물론이고 원전 운영도 불가능하다고 것이 이제 원전을 운영하는 많은 나라에서 상식이 되고 있다.

정부는 80년대 영덕·영일·울진에서 90년대 안면도와 굴업도를 거쳐 이제 부안에 이르러 파탄이 분명해진 권위주의적이고 주민을 무시하는 원자력정책에 더이상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소수의 전문가들이 끼리끼리 정책을 좌우하던 시대는 끝났다. 원자력은 이미 가장 중요한 전력원이 됐고, 좋든 싫든 우리가 만든 방사성폐기물은 우리가 처분할 수밖에 없다. 교토의정서 발효와 고유가 시대를 맞아 새롭게 대두되는 원자력 역할론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도 사회적 합의는 필수적이다. 신뢰와 소통에 터잡은 원자력정책으로 거듭나려면 먼저 ‘부안’을 끝내야 한다.

조홍섭 환경 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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