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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9.05(일) 19:14

관치금융과 노무현 대통령


“대통령이 은행장을 모아 놓고 말하면 관치금융 한다는 우려가 있어 보고만 있었다. 정부는 (은행장) 인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은행장이 흔들리면 금융권이 흔들린다.” 지난해 6월18일 노무현 대통령이 은행장들과의 첫 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그 직전에는 한-미 정상회담차 미국을 방문해 “관치금융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다짐도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이 흐른 지금 ‘은행장’이 흔들리고, ‘신관치’ 우려로 금융시장이 동요한다. 국민은행 회계처리에 대한 감독당국의 제재로 비롯된 ‘국민은행 사태’의 핵심은 정부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은행장을 제거하려는 ‘관치금융’의 재연 여부에 있다. 감독당국은 연일 이번 일이 관치와는 관계없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하는 행동은 이상하다. 제재위원회가 열리기도 전에 김정태 국민은행장에 대한 중징계가 불가피하고 행장연임도 불가능함을 강조했다. 또 회계기준 위반의 증거물이라며, 국민은행 검사과정에서 확보한 내부문서까지 공개했다. 모두 전례가 없는 일이다. 국세청이 국민은행 회계처리에 문제가 없다는 종전 유권해석을 뒤집는 것같은 발표를 한 것도 이상하다.

회계는 일반인에게는 낮선 전문분야이다. 심지어 취재기자들도 헷갈린다. 그래서 주목을 받는 게 감독당국의 제재 직전에 열린 감리위원회의이다. 감리위 구성원은 국내 최고의 회계전문가들이다. 그런데 6명의 회의 참석자 중 4명이 아예 징계사안이 아니라거나, 문제가 있더라도 중징계 사안은 아니라며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금감원은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한다. 방법은 한가지뿐이다. 회의록을 공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금감원은 공개불가 규정을 내세워 거부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다.

관치금융은 재벌체제와 함께 외환위기를 부른 주범으로 꼽힌다. 그러나 아직 한국의 금융관료들은 관치의 향수에 빠져있다. “환란과 구조조정 과정에서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 관치금융의 망령이 떠나지 않고 있다.” 이종구 전 금감원 감사의 고백이다. 김정태 행장은 정부에 맞서 시장의 목소리를 내온 대표인물이다. 에스케이글로벌과 엘지카드 부실처리 때 그 갈등은 극명했다. 정부는 금융시장 안정을 내세워 은행 공동지원을 통한 ‘대마불사’를 주문했다. 그러나 김 행장은 부실만 키울 뿐이라며 시장원리에 따른 부도처리를 주장했다. 정부가 이번 사태를 제2, 제3의 ‘김정태’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시범 케이스로 삼았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신관치’는 이미 예고됐는지 모른다. ‘시장개입주의자’로 불리는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올 2월 “시장은 어린애들 놀이터가 아니다”고 경고했다. 대통령도 6월에 은행장들과 만나 “금융업은 자율성이 필요하지만, 공공성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 전체가 흔들리는 데도 제몫 챙기기에만 급급하면서 정부개입을 반대하는 것에 대한 경고라는 분석이 뒤따랐다. 이번 사태를 소수 금융관료들만의 ‘거사’로 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의 한 고위간부는 “정부 내 반 김정태 정서는 재경부, 금감위, 금감원, 심지어 청와대 일부까지도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는 것같다”고 전한다.

경제학자 다니엘 예르긴은 “20세기는 국가 주도 경제가 쇠퇴하고 시장경제가 승리한 시기”라고 강조했지만, 진보적 경제학자들은 보수주의자보다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더 중시한다. 하지만 정부 개입은 원칙과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법과 제도라는 룰을 지켜야 한다. 관료들이 전화통만 잡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정부개입은 ‘시장실패’의 치유는커녕 ‘정부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정부의 시장개입은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세계 2위라고 발표할 정도이다. 하지만 정부실패의 정도를 보여주는 부패는 후진국 수준으로 심각하다. 노 대통령은 2002년 말 대선후보 초청모임에서 “외환위기 이후 추진해온 재벌구조와 관치금융의 개혁에 대한 의지 퇴색이 새로운 한국경제의 문제점”이라고 진단했다. 힘들수록 초심이 중요하다. 개혁의 칼을 쥘 사람이 스스로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비극이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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