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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7.11(일) 15:53

손길승과 이학수


“곽 기자, 기업을 윤리적 잣대로만 보면 안돼. 기업과 기업인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 합법과 비합법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들이요.”

지난 92년 손길승 에스케이 회장(당시 그룹 경영기획실장)이 한 저녁모임에서 한 얘기이다. 경제부 기자만 10년을 넘으면서 수많은 기업인을 만났고, 12년 세월이라는 망각의 강을 건넜지만 그의 말이 아직 생생한 것은 당시 경제부 초년병이었던 기자에게 남긴 인상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손 회장은 지금 6개월째 감옥에 있다. 지난달 28일 계열사 부당지원과 세금포탈, 분식회계, 불법 정치자금 제공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39년 전 지방의 한 직물공장에 들어가 오늘날 정보통신과 에너지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에스케이를 일군 장본인이다. 전문경영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그룹회장에 오르고,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까지 맡아 한때 가장 성공한 전문경영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예순넷의 늘그막에 내일을 걱정하는 고달픈 신세이다. 자신의 말대로 한쪽은 자유세계, 다른 한쪽은 감옥인 담장 위를 걷다가, 발을 헛디딘 것이다.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도 한국을 대표하는 전문경영인이다. 이건희 삼성회장의 ‘분신’으로, 한국 최대재벌인 삼성의 실질적인 사령탑이다. 그가 회장비서실장을 맡은 97년은 삼성이 여론을 무시하고 밀어붙인 자동차사업이 실패하고 외환위기까지 겹친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발빠른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바꾸었다. 14만 삼성맨들에게는 어쩌면 이 회장보다 더 무서운 존재일 수 있는 그 역시 지금 불법 정치자금 제공 혐의로 법정에 서 있다. 검찰조사의 고통으로 한때는 자살까지 고민했다고 한다. “30여년간 회사를 위해 열심히 했는데, 불법 요구를 뿌리치지 못한 것을 뼈져리게 반성한다….” 지난달 18일 목이 메인 채 최후진술을 한 뒤 법정을 나서는 그와 눈길이 마주쳤을 때는 기자도 착잡한 심정이었다. 불법 정치자금을 준 기업인 대부분이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그는 재판부가 자금출처를 의심하며 오는 14일로 공판을 연기하면서 여전히 마음을 졸이고 있다.

손길승 회장과 이학수 본부장은 법의 심판대에서 이구동성으로 윤리경영과 정도경영을 강조했다. 손 회장은 임직원에게 보낸 옥중서신에서 “과거의 모든 낡고 어두운 구태를 짊어지고 경영일선에서 떠나고자 한다”며, “잘못된 관행과 구습은 과감이 타파하고 새로운 기업으로 일신해달라”고 당부했다. 이 본부장도 “기회를 주신다면 어떤 경우에도 법을 지키고 정도경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 모두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에서 목숨을 걸고 ‘공중재비’를 넘어야 했던 불행했던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한 셈이다.

다행히 4·15 총선 때는 한층 강화된 사회적 감시 때문인지 돈 달라는 정치인이 없었다고 한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2007년 대선 때는 아마 불법 정치자금을 주는 기업이 없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높인다. 하지만 아직 재벌들의 다짐에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일종의 위기모면용 눈속임 아니냐는 의심이다. 8년 전 천문학적인 뇌물을 대통령들에게 준 혐의로 무더기로 법정에 섰던 재벌들이 “권위주의 시대에 있었던 일로 (이제는) 청산할 과제”라고 다짐하던 모습이 아직 생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분명한 것은 재벌들의 다짐과 상관없이, 우리사회에서 ‘양치기 재벌’에 대한 관용은 더이상 기대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정치권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공포 때문”이라는 변명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최근 부정비리 혐의자들의 잇단 자살은 한국사회가 가는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법과 편법의 ‘탈출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들이 줄줄이 법정에 서는 것은 정말 국가적 비극이다. 어두운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역사의 제단 위에 피를 뿌리는 일은 지금까지로 족하지 않겠는가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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