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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2.19(일) 19:50

박물관에 가기 싫어진 까닭


어린 시절부터 역사를 좋아했던 내가 가장 자주 갔던 곳은 바로 박물관이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도 도착한 다음 날 국립중앙박물관을 마치 순례자가 된 듯한 기분으로 견학했던 기억이 난다. 많은 어린 학생들이 견학을 와서 구경하는 광경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아,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인 만큼 어릴 때부터 과거를 존중하도록 아이들을 잘 키우는구나’하고 생각되었다. 그 생각이 순진했다는 걸 언제 깨닫게 되었던가? 국가 제도사와 군사적인 이야기가 골격을 이루는 국정 국사교과서를 처음 읽었을 때였던가? 아니면 왕족·장군들이 역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극을 처음 시청했을 때였던가? 어쨌든 나는 오래지 않아 한 가지 근본적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각종 박물관의 주된 고객인 견학 학생들은 단순히 ‘과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뜻에 맞춘 국가주의적 방향으로 박제된 과거의 이미지를 시키는 대로 학습한다는 사실이다.

그럼 학생들이 보고 외워야 할 과거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 견학생들에게 국가적 소속감을 주입해야 하므로 박물관 전시에서는 ‘우리’와 ‘남’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전시용 유물들은 ‘우리 것’ 위주로 골라지고 ‘남의 것’들은 비록 ‘우리’와 연관돼 있다 하더라도 홀대를 받는다. 예컨대 고대·중세의 불탑·사찰이나 불상·사리함과 같은 불구(佛具)를 잘 이해하려면 멀리는 인도·서역, 가까이는 중국·일본의 유물과의 구체적인 비교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의’ 박물관은 ‘우리 것’만을 내세운다. ‘우리 전통의 우수성’이 강조돼야 된다는 것이 명분인데 우수성이 잘 보이게 하기 위해 보편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망각되는 것이다. 문화 교류 역사에서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면 고구려의 낙랑 계통 주민과 백제의 일본계 관료부터 일제시대의 화교까지, 이 땅에서 함께 동고동락해온 수많은 혈통적인 ‘남’들의 이야기도 들려줘야 하는데, ‘동북아의 허브’가 되려는 나라답지 않게 박물관들은 이 점에 대해 너무 인색하다. 그러한 박물관을 견학하던 학생들이 나중에 이주노동자들을 도외시·이질시하게 되는 것이 놀라운 일인가?

둘째, ‘우리’ 국가가 진·선·미의 화신으로 인식돼야 하는 만큼 박물관이 만들어서 보여주는 ‘우리’의 과거는 마냥 아름답기만 하다. 보기 좋은 청자·백자·산수화·예복 등은 박물관의 제한된 공간에서 하나로 어우러져 보는 이의 미의식을 자극해 ‘우리’의 역사를 허물없이 예쁘게만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 어느 계급사회도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과거만을 가질 수는 없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지폐에서까지 모습을 보이는 율곡·퇴계가 실은 수많은 노비를 부리면서 살았던 귀족이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사대부가 노비를 때려죽이더라도 형벌 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도 가르치고 함께 토론해보는 교육을 한다면 군대·학교·가정을 비롯한 사회의 여러 부문에 아직 만연하고 있는 폭력이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셋째, 외세 침략과 같은 외부적 모순들이 박물관의 전시에 반영돼도 ‘우리’ 역사의 내부적 모순들은 주로 은폐된다. 예컨대 ‘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리는 불상의 조성이 사찰노비의 강제된 노동과 국가라는 폭력조직의 보시로 이루어졌다면 그건 부처의 가르침으로 보아 심각한 모순이다. 그러나 박물관은 비판의식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름다운 우리 역사’는 감상용이지 반성용이 될 수 없다.

언젠가 민중의 웃음과 울음소리가 동시에 들리고 과거의 명암으로 현재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박물관이 생길 수 있을까? 사학계가 ‘국가관’이나 ‘단일민족론’이라는 강박관념을 벗어버리고 민중이 과거에 대한 집단 기억을 규정하는 주체로 나설 수 있다면 불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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