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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1.21(일) 18:56

‘유일 사상 체제’의 그늘


이번 강의석 군의 고투로 해당 고교에서 예배필수가 아닌 예배선택권이 어렵게 얻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특정 종교를 강요하는 나머지 대다수 종교계통 학교의 행태를 보노라면 서글픈 역사 법칙이 생각난다. 어떤 담론이 초기에 아무리 진보성을 가졌다 해도 점차 세력을 이루어 체제에 순응되기만 하면 오히려 극단적 반동의 모습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법칙이다.

두 세기 전 조선의 성리학적 ‘유일 사상 체제’에 맞섰던 또 하나의 ‘강의석’, 초기 가톨릭 신도 바오로 윤지충(1759-1791).

사대부들에게 절대 필수였던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윤지충은 “국시 사범” “불효 막심한 사학(邪學)쟁이”로 지목돼 처형됨으로써 조선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동아시아 가톨릭들에게 제사를 금지시켰던 당시 교황청의 처사를 우리는 획일주의적 서구중심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억압적인 성리학 체제에 대한 가톨릭들의 종교적 반란은 체제 밑에 깔려 있던 당대의 여성·하층민들에게 통쾌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강의석’들이 목숨을 놓고 신념을 지켰기에 성리학적 절대주의 체제는 결국 여러 종교·이념들이 공존하는 상대주의 체제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조선 기독교의 이와 같은 진보적인 성격이 반대로 돌아서게 된 전환점이 언제일까? 주요 선교 단체들이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고 독립투쟁을 지원해 달라는 애국자들의 요청을 매정하게 외면한 1900년대부터일까? 학교 부실 운영과 조선 풍습에 대한 모독, 학생 생활에 대한 지나친 통제·감시로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해도 끝까지 ‘원칙’(?)을 고수하고 고집을 부렸던 1920년대부터일까? 사실 1920년대 초 배재·호수돈·정신 등 명문 개신교 계통 학교에서 학생 동맹휴학을 취재한 신문 기사들을 보면 이미 학교는 ‘전제적 왕국’을 방불케 했다. ‘기독교는 선진 문명’이라는 공식은 이미 1920년대에 무너졌지만, 교단의 보수화·반(反)민중화는 1930년대 후반 일제 전쟁에의 부역과 1945년 이후 미군정·이승만 체제 하에서 ‘준국교화’로 완결 지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성리학으로 탄압 받았던 종교가 이제는 반도의 한 쪽에서 성리학이 비워 준 자리를 그대로 차지해 그 폐단을 일체 답습하여 확대 재생산하게 된 것이다.

자파만이 구원받을 사람이고 일체 타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지옥 간다!”고 저주하는 일부 개신교도의 배타성은 이북에서 성리학이 비운 자리를 차지한 ‘유일 주체사상’과 과연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들과 북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다같이 자기 중심주의, 자만적 과대망상증, 절대성의 논리와 타자에 대한 배제를 특징으로 하는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은 그들의 놀랄 만치 광적인 ‘반북 정서’를 설명해주는 단서가 된다.

전교 학생들에게 예배를 억지로 강요하면서 신을 숭배하는 것은 과연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인가? 무섭게도 그들이 실제로 믿는 것은, 그렇게 인권을 유린해도 ‘주류’ 사회의 견제를 받지 않을 만큼 강하고 든든한 그들의 조직과 영향력이다. 약육강식의 논리를 받아들인 그들에게는 힘센 자와 가진 자야말로 복 받은 자이며 영웅이다. 힘의 논리를 부정함으로써 2000년 전에 출발한 기독교는 이제 이 땅에서 그 정반대로 둔갑되고 만 것이다.

한국 교회가 초발심으로 돌아갈 길은 이번 강의석 군의 외로운 저항에서 정의를 갈구하는 마음, 신념을 지키는 의지, 남에 대한 존중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겸허하게 배우는 길이다. 그러나 2000년전 유대인 성직자들이 목수 아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독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의 ‘높으신 분’들은 단식으로 쓰러진 학생의 야윈 얼굴에서 윤지충의 모습을 볼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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