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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9.19(일) 19:28

오태양님에게


안녕하십니까?

님이 구속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과거 청산의 목소리도 높은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이들은 제국주의가 남긴 가장 흉악한 유산이 일체 남성은 병사가, 일체 여성은 현모양처가 돼야 된다는 강제적 성별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어찌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현모양처가 되어 나라를 위해서 아이를 낳아 훌륭하게 키워라” 같은 소리들은 이제 지상명령으로 들리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일부 남성들에게는 일제말기 조선의 ‘황민화’를 주도했던 ‘반도의 히틀러’ 시오바라 토키자부로(총독부의 학무국장)의 “가장 빛나는 국민의 영예는 바로 국가의 위대성으로 살며 국운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신성한 병역”이란 말이 진리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일제의 ‘전통’을 이은 세뇌 체제의 탓도 있지만, ‘신성한’ 의무를 다했기에 여성·장애인 등 ‘나라에 충성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을 만만한 존재로 대해도 된다는 왜곡된 특권 의식도 문제일 것입니다. 한국적 파시즘의 기본 구조가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일제의 남성 우월주의적 국가주의의 결합인 만큼, 파시즘의 해체 작업에 있어서 우리 남성들의 집단의식이야말로 큰 문제로 부상되는 것입니다.

제가 병역거부를 논할 때마다 듣는 질문은 “아무나 다 거부할 수 있으면 나라를 누가 지키겠는가?”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질문을 하시는 분들께 저는, 평화주의의 전통이 깊고 대체복무 경력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북유럽에서조차 대체 복무 신청자의 수가 전체 징집대상자의 10~15% 정도밖에 안된다, 한국과 전통이 가까운 대만에서는 대체복무를 선택하는 사람의 수가 수천 명을 넘지 않는다, 한국처럼 군사주의가 강하고 예비역들을 선호하는 사회분위기에서라면 개인적 신념이 강한 극소수만이 ‘평화주의자’의 낙인을 감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만 제 말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실, 그들의 질문 속에는 “한 사람이라도 병역을 합법적으로 거부하면 징병제의 신성함이 없어져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즉 “모두들 몸과 마음을 국가에 바치는” 국가가 아니면 결코 그 국가가 지켜질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예외를 모르는 국가적 전체성은, 그들에게는 국가의 ‘신성성’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가시적인 ‘다름’을 ‘망국병’으로 생각하고 인권이 아닌 국가와 무력을 신성 불가침한 존재로 여기는 황국신민 수준의 사고야말로 청산해야 할 과거 유산이 아니겠습니까?

이 왜곡된 ‘상식’에 앞장서서 반기를 들어야 할 집단은 다름 아닌 종교계입니다. 특히 일제 말기에 군국주의적 굴절이 태심했던 한국 종교계의 경우에는 자기 반성의 의미로라도 군사주의 근절에 적극적으로 나설 의무가 있습니다. 예컨대 불교계의 경우 “미·영 귀신들을 죽이면 죄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보살도를 실천하게 된다”고 시국 강연하는 등 일제 말기의 전쟁 협력이나 베트남 파병 때의 박 정권에의 협력도 커다란 오점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종교 단체들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있어서 일제시절을 방불케 하는 논리로 반대하거나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속에서 살면서도 미래를 대표해야 할 종교계마저 과거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면 과거 청산이 쉽겠습니까?

지금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들은 인간이 국가·자본의 부품이 돼버린 사회에서 인간을 결코 부속품으로 만들 수 없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초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시겠지만 용기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해방이 오고 나서 ‘불령선인’들이 독립운동가인 줄 밝혀졌듯이, 파시즘의 주술이 풀린 뒤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며 박노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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