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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5.30(일) 17:26

사회의 첫 경험 ‘알바’


몇년 전 한국에서 학생들과 러시아어 수업을 한 적이 있다. 가끔씩 나는 효율적인 학습을 위해 학생들의 일상 생활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수업을 했다. 환란 위기가 한창이라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진 많은 학생들이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서 비정규 노동의 ‘전선’에 뛰어들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자, 학생들의 얼굴 표정이 금세 달라졌다. 피부에 와닿아 재미있겠다는 눈빛의 학생들도 있었고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표정들도 있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그들에게 노동의 경험이 가슴앓이기도 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본 외국인 학생들에게서 급여 체불이나 불의의 감봉 등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던 나는 그 문제가 학생들을 어둡게 만든다고 짐작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만은 아니었다.

대화를 시작한 학생은 나에게 먼저 “러시아어로 ‘동네북’이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의아해서 “노동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왜 그런 단어가 나오느냐”고 되묻자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 일을 한다는 그 학생이 토해내듯이 말했다. “우리 처지를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한쪽에서는 피곤한 직장인 손님들이 스트레스를 저한테 풀려고 고함지르거나 막말을 하고, 다른 쪽에선 지배인 아저씨가 심심할 때마다 기분 나쁜 농담을 하고요.… 선후배들 중에서 초과 근무를 하게 되거나 돈을 제때에 못 받거나 아예 못 받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 그래도 그렇게까지 당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발 닦는 걸레가 된 듯한 기분은 일을 그만두고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이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각종 아르바이트 경험담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3분의 1 가까이가 성추행에 시달린다는 중·고생 ‘알바’보다 대학생들은 적어도 그 부분에서 고생이 덜하다는 웃지 못할 ‘비교 우위론’도 들렸는데, 대다수는 사장들의 근로계약 작성 회피나 막말, 외모에 대한 모욕적 발언, ‘엿장수 마음대로’의 월급 지급 등을 흥분된 목소리로 고발했다. 편의점 같은 곳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이 시간당 2000~2500원만 받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된 나는 그후 편의점 갈 때마다 아르바이트생처럼 보이는 직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부끄러웠다. 상품을 언제든 편의점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 혜택을 누리는 고객인 나도 이 젊은이의 고혈을 짜고 있는 보이지 않는 착취의 공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르바이트라는, 절반 정도의 대학생들이 겪어보는 사회화의 과정에서 배우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힘 있는 자(사용자)가 힘이 약한 자(아르바이트생)에 대해서 기본적인 법적 절차(계약 작성, 정확한 사례 지급)를 무시해도 된다는 무법 사회의 ‘역학 관계의 법칙’, 상위자이니 하위자의 인격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수직관계 위주 사회의 인간적 존엄성 무시의 관행, 최저 임금 이하의 월급으로 무력한 ‘알바’들을 등쳐먹는 업체가 흑자만 내면 ‘효율적 경영’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일그러진 ‘경제 상식’.

인권의 ‘인’자도 보여주지 않는 정글 자본주의의 연습이 차세대가 노동현장으로 진출하는 통과의례가 된다면 차후 우리 사회가 복지·안정 위주의 사민주의 체제로 재편되기가 쉽겠는가 지금도 ‘알바’ 인권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단체들이 적지 않겠지만, ‘알바’에 대한 부당 행위의 근절, 청년에 대한 사회적 대접의 개선은 진보정당도 학생운동 단체들도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되어야 한다. 우리 학생들이 사회를 배우는 ‘청년 시절의 노동’ 아르바이트가, ‘동네북’ 신세가 아닌 보람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경험이 돼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는 아르바이트생 인권 보호에 진척이 있어야 한국 사회의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나이 차별과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 문제에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 싶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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