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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5.02(일) 19:29

‘성공’의 멍에


몇 년 전에 나는 1980년대에 한국에서 살았던 인도 학자를 만난 일이 있다. 한국 생활이 어떠했는지 묻자 그는 “여러 모로 편안했지만 늘 한 가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했다. 공포라 인도에 비해 치안 상황도 나쁘지 않았을 테고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아시아인에 대한 ‘푸대접’이 오늘만큼 심하지 않았는데 과연 무슨 공포였을까 그런데 답이 뜻밖이었다. “명함 지니는 걸 깜박 잊고서 외출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한국에서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닌가”

전근대적 가부장제와 근대적 개발 지상주의가 결합된 한국 사회의 주된 피해자로 여성들이 우선적으로 여겨지는데, 틀린 것은 아니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돼 있는 여성들은 대개는 가장인 남성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또 폭언·추행을 감수해야 하는 피보호자·피부양자로 간주된다. 그런데 헤게모니를 쥔 남성은 과연 진정한 행복을 맛보고 있는가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내밀 명함이 없는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명함에 ‘장’나 ‘사’자에 ‘알 만한’ 조직 이름의 몇 글자를 쓸 수 있기 위해서 ‘대한 남아’는 결국 독립적 인간인 자신을 ‘성공’의 제물로 삼아야만 한다.

물론 ‘입신양명’ 같은 표현들은 근대 이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인들의 인생관(觀)은 ‘입신양명’이 아닌 안빈낙도하면서 글밭을 가꾸는 등 다양한 삶의 방식들까지 함께 존중해 주었다. 이와 달리 근대의 헤게모니적 남성관(觀)은 ‘남자된 도리’를 획일적으로 제도권 내의 신분 상승, 다시 말해 ‘출세’로 규정한다. 원래는 “세상을 벗어난다, 승려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가 근대에 접어들어 일본어의 영향으로 영어의 ‘career’ 번역어 쪽으로 뜻이 변질된 ‘출세’란 말은 우리에게 뭘 요구하고 있는가

암기 경쟁에서 남들을 제압하여 입시·고시 같은 관문만 통과하는 것만 아니라 인맥 만드는 기술, 동창회든 향우회든 인연들을 잘 챙기는 능력, 필요한 사람과의 관계에 필요한 만큼 적절히 투자하는 ‘네트워크 관리’의 솜씨 등을 요구하기도 한다. 미시적 권위주의가 강한 만큼 권력·권위가 작용되는 관계에서 표정·어투 관리 등의 연기력도 출세 길에 영향을 주는 부분이다. 영어가 물신화됐기에 일과 술로 채워지지 않는 시간을 ‘출세에 중요한 영어’ 공부에 헌납하는 것 역시 관건 중의 하나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 ‘힘’ 냄새를 풍기며 번쩍이는 글들이 새겨진 명함을 얻은 ‘출세한 남성’이라면 자신의 귀한 젊음과 인생을 그 명함의 값에 다 바쳤음을 깨달았을 때 밀려오는 허탈감에 잠 못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안간힘을 다 썼음에도 ‘가장의 체면’을 세울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남자라면 소외감·좌절감이 심해 심신이 모두 황폐해지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홧병, 가정 불화, 성생활 장애로부터 암이나 호흡기병, 요절 등 ‘좌절된 출세 욕구’가 가져다 줄 수 있는 파괴 효과는 엄청나다. 우리 모두의 ‘국민 종교’가 돼버린 ‘명함 숭배’라는 것은 인신 제사를 요구하는 잔혹한 사교(邪敎)인 것이다!

이 ‘명함 교(敎)’를 해체시키는 길은 무엇일까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려는 개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 무엇보다 ‘승자 독식’ 구조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 예로 서열적인 학벌 구조나 임원을 뺀 나머지 사원을 현대판 노예 격인 비정규직으로 채우는 노무 관리 관행 등을 본격적으로 바꾸는 것이 관건이다. ‘출세’를 안해도, 고위 간부급이 되지 않아도 평등하고 안정되고 여유를 갖춘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민주의 지향적인 사회를 만들지 않고서는, ‘명함이 사람 잡는’ 이 세상을 바꾸기가 힘들 것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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