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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4.04(일) 19:04

탄핵사태, 그 역사적 본질


비극의 시대들이 희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인가 눈뜨고 볼 수 없는 저질의 꼴을 보여 준 극우와 지역 토호들의 ‘탄핵사태’를 지켜보면서 새삼 역사가 변화해 가는 감이 들었다. 반세기 동안 공포정치를 펴온 ‘마피아’형 극우 지배층이 이제는 코미디언 같은 모습으로 자신들의 ‘주먹’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게 된 것이다.

국가 지배층의 ‘구주류’를 ‘마피아’로 명명해도 되느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한이 미군정과 토착매판(친일) 세력의 야합에 의해서 ‘종속 정권’으로 탄생한 만큼, 그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엄청난 괴리가 벌어졌다. 진정한 ‘풀뿌리’ 기반을 가질 리 없었던 극우 지배층이 ‘사적인 인연’(혈연, 학연, 지연, 추종 관계 등)을 매개로 해서 만들어진 여러 ‘벌’(閥)들의 기형적인 형태로 존재해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벌’의 종류들이야 지방 사립학교재단부터 박정희 등의 군벌까지 수없이 다양했지만 그 지배 방식은 하나였다. 특정 영역을 배타적으로 수취하면서 획득한 재화·상징자본을, ‘벌’의 수장에 대한 ‘벌’ 구성원의 친소·충성의 정도에 따라 위계질서적으로 재분배하면서 ‘벌’의 인화단결과 통제력을 공고화·영구화시키는 것이다. 군 장교의 진급을 지휘()했던 ‘하나회’의 행각이나, 재벌한테서 갈취해낸 돈으로 부하들을 살찌웠던 역대 독재자의 범행, ‘충성스러운’ 제자들에게 교수 자리를 ‘하사’하는 학계 ‘오야붕’의 추태에서는, ‘벌’단위 지배의 논리가 관철된다. ‘벌’ 지배자들의 핵심 심성은 바로 이번 탄핵사태에서 보여준 집단이익의 절대화와 공공의 선에 대한 무관심이다. 수취 대상밖에 안 되는 관련 영역의 부실화, ‘벌’조직 밖에 있는 대다수의 소외·불만, ‘조직’ 앞에서 개인의 무력화, 그리고 전 사회적 허탈감, 박탈감의 확산은 이 지배 방식의 산물들인 것이다.

그런데 폐쇄적인 ‘벌족’들이 이 나라를 어떻게 여기까지 이끌어 왔는가 주된 요인은 내외적 압력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등 군벌의 경우에는 내부적으로 경제적 ‘성과’를 통해서 강도적 정권의 ‘정통성’을 세워야 했으며, 외부적으로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벌여, 나아가서 세계체제 속의 ‘신분상승’을 꾀해야 하지 않았던가 1960~80년대의 부패한 군벌, 관벌들이 일단 물량 늘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이와 같은 압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외부 압력이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으로 사라지고 내부 압력이 1987년의 ‘유예된 혁명’ 이후에 약화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부터, ‘벌족’의 지배체제는 파행으로 치달았다. 공적인 성격을 갖지 못한 정치인·고관·재벌들은 ‘검은 거래’나 무리한 몸집 불리기가 1997년의 환란을 초래했으며, 그 후에 파산선고 받은 극우는 중도우파에 정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김대중의 신자유주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에 중도우파가 재집권에 성공한 이유는, ‘벌족’에 대한 대다수의 반감이었다. 갈수록 영향력을 잃었던 영·호남의 지벌(地閥) 정객들이 탄핵이라는 치명적인 자살골을 넣게 된 것은, 반(反)국민적 사당(私黨)뿐인 그들이 공당의 체면을 챙길 만한 지능마저 상실했다는 것을 뜻한다.

탄핵 사태로 그 ‘정치 조폭’으로서의 본질을 드러낸 한·민의 ‘호족’들은, 곧 다가올 총선에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은 불보듯 뻔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중도우파 지배층은 대북관 같은 일부 분야에서는 극우들과 차별성을 보여도, ‘인연’ 중심의 조직 운영이나 노동·민중에 대한 괄시의 차원에서는 기득권층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중이 직접 정치세력화되지 않고서는 대다수의 시민은 계속 각종의 ‘줄’로 탄탄하게() 매어진 ‘높으신 분’들의 동원 대상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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