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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3.12.11(목) 18:26

“색깔 있는 자”도 품을 수 있는


외국에 오래 살아도 마음이 동화되지 못하고, 북한과의 오랜 인연에도 유일사상에 용해되지 못하고 …. 어디에서도 집단의 확고한 일원이 되지 못한 경계인 송두율은 꿈에도 그리웠을 고국에 가자마자 조사, 심문, 구속까지 당하게 되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이역에서 보낸 사람에게 그간 쌓인 한을 풀 시간도 주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설득력 있게’ 부정하라고 강요하는 중세 종교 재판관풍의 공안꾼들에게 인간의 마음이 있는가 의심하게 된다. 그가 왜 남한의 인권적 성숙을 과대평가하고 갔는지 아쉽기도 하고, 이 소식에 아연실색하는 유럽의 지식인들 앞에서 당황하기도 했다. 복잡한 이 세상을 흑색과 백색만 보이는 특유의 색안경을 끼고 다니는 자들은 역사에서 유감스럽게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절대선, 그들은 절대악” 식의 배타주의의 제단에 바쳐진 첫 경계인은 누구인가 불자가 신라의 공민이 될 수 없다고 해서 죽음을 당한 이차돈에 대한 기록은 다분히 설화적이니, 가까운 18세기 말을 생각해 보자.

‘사학’(邪學: 천주교)을 금하는 법이 오늘날의 국가보안법만큼 살벌했던 그 시절, 학구열이 강한 이승훈(1756~1801)이라는 젊은 선비가 사행 편에 중국으로 ‘잠복’하고 거기에서 ‘반국가 단체’ 격인 서양 신부들과 회합하고 ‘노동당 가입’쯤 되는 영세·입교를 했다. 비서구 문화들에 대한 상당한 배타성을 보였던 가톨릭 교회와 전통적 유교 문화의 경계에서 배회하고 고뇌했던 그였지만, 고문 끝에 그를 죽인 노론 지배자의 ‘공안’ 담당관들에게 그는 ‘거물 간첩’일 뿐이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두 명의 ‘반국가 분자’(순교자)가 난 집안에서 태어난 김대건(1822~1846)도 중국으로 ‘잠입’해 거기에서 ‘간첩 교육’(선교사에게 라틴어와 서양 학문을 익히는 것)을 받은데다 ‘노동당 간부’(가톨릭 신부)까지 된 혐의로 역시 고문 끝에 죽는다. 오늘날에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승훈, 김대건 두 사람은 ‘성현’의 대접을 받고 교인이 아닌 필자에게도 그들은 신앙의 자유와 인권의 확립에 공헌을 세운 영웅으로 인식된다. 두 문명 사이에서 살다 본인의 뜻대로 신앙생활을 할 권리를 얻기 위해 고통을 받고 죽은 두 사람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두 세기가 지나고 우리 후손들은 경계인 송두율과 그를 박해한 자들을 과연 어떻게 기억할까 천주교를 박해했던 노론 귀족들은 바깥 세계를 몰랐고 유교 지상주의와 같은 유아독존적 통념에 사로잡혔다는 정상 참작을 해줄 수 있어도, 송두율이 북한 노동당에 가입해도 괜찮아할 독일을 ‘선진국’으로 숭배하고 있는 한국 극우들의 죄악은 몇 배로 무겁게 평가될 것이다.

물론 탈세속적인 요소가 중심이 되는 보편주의적 종교와 ‘민족적 특수성’ 중심의 북한 주체 사상이라는 극단적인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표면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문제는 ‘타자’를 ‘이단’으로밖에 볼 줄 모르는 단순하고 광적인 배타주의적 태도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이러한 태도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대표적인 소수 집단은 수배 조처로 아플 때 병원에 갈 수도 없고 아픈 부모를 돌볼 수도 없는 한총련 학생들이다. 독일 국적 소유자이자 국제적으로도 알려져 관심거리가 될 수 있는 학자인 송두율과는 달리 대부분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한총련의 힘없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된 학생들에 대한 폭력과 인권유린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리고 북한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지도 않은 고민의 화신인 송두율마저 껴안을 줄 모른다면 진짜 주체사상 신봉자들을 어떻게 껴안고 화해와 통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통일을 위해서도 이 땅에 진정한 개인주의적, 민주주의적 사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도 송두율에게 관용이 반드시 베풀어져야 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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