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주요기사
지난기사

기사검색



  • 편집자에게
  • 광고안내
  • Site Map
  • 신문구독신청
  • 편집시간 2000년12월24일20시09분

    한겨레/ 사설·칼럼/ 강만길의 역사칼럼
    [역사칼럼] 평양서 만난 장기수들

    지난 11월 28일부터 7박8일간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초청으로 평양·개성·묘향산 등지를 다녀왔다. 북녘 역사학자들을 만나고 역사기념관 등을 관람하고 고적들을 보고 왔는데 할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우선 무엇보다도 북으로 돌아간 장기수 선생들을 만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북으로 간 뒤 남쪽에 두고 온 가족과 친지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그분들을 위해 서울에 돌아가면 <한겨레> 칼럼에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그 분들을 만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나의 새벽 일과 때문이었다. 늙어가면서 규칙적인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헬스장인가 하는 곳을 다닐 생각은 없었고, 대신 30년 넘게 살고 있는 수유리의 뒷산을 새벽에 1시간 이상 오르내린 지 거의 10년이 되었다. 겨울철에는 깜깜한 새벽에 산을 오르기 위험해서 국립 4·19 묘지에 가서 1시간 반쯤 속보로 걷는데, 이 일은 외국 여행 중에도 거르지 않았다. 낯선 외국 도시에서 이른 아침에 멀리 걷기가 어려우면 호텔 주변을 돌면 된다.

    지난 6월 남북정상회담에 수행했을 때도 숙소인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주암산초대소 주변을 걸었는데 경치가 대단히 좋은 곳이었다. 이번에 묵은 보통강호텔은 바로 곁에 보통강이 흐르고 강을 따라 길 양쪽에 버드나무 가로수가 잘 가꾸어진 곧은 길이 1㎞ 남짓 뻗어 있어서 정말 걷기 좋은 곳이었다. 평양에서는 서울에서보다 1시간 늦은 6시 반에 호텔을 나섰는데 북쪽이라 그런지 더 어두운 것 같았다. 그런데도 사람의 내왕이 더러 있고 어린 아들과 함께 조깅하는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새벽에 출근하는 어느 40대 여성과 함께 걸으면서 서울에서 왔음을 밝히고 말을 걸어 봤다. 전혀 거리낌없이 대해주고 묻는 말에도 거침없이 대답해 주어 마치 이웃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나흘짼가 되는 아침에 조금 늦게 나가서 걷고 있는데, 앞에 6~7명의 노인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옷차림이나 분위기로 봐서 북쪽 노인들은 아닌 것 같기에 일본인들이리라 생각하고 옆을 지나치다가 들으니 우리말을 하고 있었다. 돌아보면서 “남에서 왔습니까?” 하고 말을 걸었더니 “그렇습니다” 하기에 “나도 남에서 왔습니다만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묻는데 그 중 한 분이 놀라워하면서 “강만길 교수시죠?” 하고 되물어 왔다. 그러고는 “우리는 얼마 전에 남에서 온 비전향 장기수들입니다” 했다. 그분은 내가 대표로 있는 동아시아 평화·인권위원회에서 주최한 광주의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했었다고 했다.

    이름이 말하듯 넓은 땅 평양에 잠깐 와 있는 사이에 이렇게 우연히 그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니 정말 기적이라 느껴졌다.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강변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얼마 전에 정부가 보통강 근처에 아파트를 마련해 주어 북쪽에 가족이 없는 분들의 경우겠지만 모두 함께 모여 살면서 아침 산책을 나왔다는 것이다. 몇 분이나 함께 사는지 미처 못 물어 봤으나 모두 건강하고 편안하고 안정된 모습이었다. 내 일정이 바빠서 그날은 그대로 해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비슷한 시간에 나가서 걷고 있는데 그분들 역시 일과처럼 산책을 나와서 또 만나게 되었다. 내일 아침 일찍 평양을 떠나 베이징을 거쳐 서울로 간다고 했더니 남에 두고 온 가족의 소식을 들을 수 있고 또 자신들이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돌아가면 글을 써서 소식을 전할 수 있겠다고 하자 몇 분이 이름을 말해주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분들은 김선명·이경구·한상호·홍명기·이두균 선생 등이다.

    신념을 굽히지 않으려고 30년, 40년 옥살이를 하고도 또 신념대로 살기 위해 북행을 선택한 비범한 사람들이면서, 남에 두고 온 가족이 그리워 한 가닥 소식이라도 전하려 애쓰는 평범한 사람들이기도 한 그들을 보면서, 수없이 생각해 온 인간을, 민족을, 그리고 역사를 또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



    [Home | 사설칼럼|기획연재|정치|경제|사회|스포츠|국제|증권|문화생활|정보통신|만화|전체기사] []
    copyright(c)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