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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2.21(화) 19:24

엘지그룹의 멍에


1년 만에 엘지(LG)카드가 다시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올해 초 5조원 넘는 자금을 쏟아부어 봉합했지만, 누적적자 탓에 재무구조가 악화돼 1조2천억원 규모의 자본금 재수혈이 필요하게 됐다. 엘지카드 채권단은 이 중 7700억원을 엘지그룹이 책임질 것을 요구하면서 응하지 않으면 엘지카드를 청산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엘지가 갖고 있는 엘지카드 채권 1조1750억원 중 후순위 전환사채로 바꾸기로 돼있는 회사채 5천억원과 구본무 엘지 회장 일가 등 개인 대주주가 보유 중인 기업어음·회사채 2700억원을 출자로 전환하라는 요구다.

엘지 쪽은 거부했다. 연초 엘지카드 정상화를 위해 채권단이 자금을 수혈할 때 엘지도 1조1750억원을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지원하고 경영권도 포기해, 할 바를 다했다는 주장이다. 엘지가 내는 돈은 이 금액까지만 하기로 합의문도 작성하지 않았냐고 항변한다. 시장원리에 맞지 않아 계열사들에게 지원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고도 반박한다. 일리는 있다.

그렇지만 떳떳한 항변은 아닌 듯하다. 엘지카드 이해 관계자는 네 그룹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채권단 위탁경영으로 넘어갈 때까지 엘지카드를 경영해 왔던 엘지 쪽 대주주들, 채권단, 엘지카드 직원, 엘지카드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한 투자자들이다.

채권단은 연초에 3조6천억원의 채권을 출자전환하고 그 뒤 채권 2조원을 만기연장하는 등 큰 손해를 봤다. 엘지카드 직원들은 회삿돈을 빌려 우리사주를 배정받고 회사를 살리기 위한 증자에도 참여했지만 감자 등으로 빚만 남았다. 그렇게 진 빚이 1억원이 넘는 직원도 있다고 한다. 절반 이상은 직장을 잃었다. 개인투자자들은 2002년 4월 엘지카드 상장 이후 1조원 가량 투자 손실을 본 것으로 증권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또 2003년 7월에 발행된 6천억원 규모의 만기 5년짜리 후순위 회사채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피해를 볼 판이다.

부실책임이 큰 엘지 쪽 대주주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이들은 2003년 3~4월과 10월 등 고비때마다 주식을 처분하고 빠져나갔다. 엘지카드 노조 쪽은 구본무 회장 일가와 계열사가 거둔 시세차익이 8400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대주주들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 동안 3212억원의 배당도 받아갔다고 노조는 말한다. 합하면 1조2천억원이다. 증권업계에서도 엘지 쪽 대주주들이 거둬간 돈을 1조원 정도로 보고 있다. 엘지카드 납입 자본금은 2002년 12월 기준으로 3700억원이다. 대주주들은 투자한 돈보다 훨씬 많이 가져갔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돈은 엘지가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하는 데 큰 보탬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엘지 쪽은 그래서 연초에 1조1750억원을 지원하지 않았냐고 할지 모르나, 엄밀히 말하면 손실책임을 진 게 아니다. 빌려준 것이다. 금리가 연 7.5%로 높은 편이고, 이자도 꼬박꼬박 받고 있다.

엘지도 겉으로는 거부하면서도 얼마간 출자전환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다만 금액을 최소화하기 위해 채권단과 ‘협상게임’을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엘지의 이런 모습은 국민들의 눈에 책임 없는 자세로 비치기 십상이다. 엘지가 외치는 ‘정도 경영’과도 거리가 있다. 궁지에 몰리면 꼬리만 떼주고 달아나는 도마뱀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채권단 압박 때문이 아니라, 부실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로, 한때 엘지그룹 일원이었던 직원과 엘지를 믿고 투자한 투자자들을 위해 법이 허용하는 한도 안에서 최대한 기여하겠다고 스스로 나서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대주주 일가 수가 많아 일일이 동의를 구하기 어렵다면 집안회의라도 열어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 금액은 그 다음 문제다. 그것이 엘지카드로 인해 엘지그룹이 쓰고 있는 멍에와 불명예를 벗는 길이다.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시장원리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떠받드는 애덤 스미스도 <국부론>에 못지 않은 저서 <도덕감정론>에서 뛰어난 분별력은 최고의 머리와 최고의 가슴이 결합했을 때 나온다고 했다.

김병수 경제부장 byung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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