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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2.16(목) 16:20

그림자 놀이


안방 서랍장 위엔 결혼사진이 걸려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딸이 놀린다. “이건 아빠가 아냐, 아빠가 이럴 수가 없어!” 15년 전 결혼 때와는 많이 달라진 얼굴 부피, 그리고 더 두툼해진 몸피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15년 전의 혈기방장하던 젊은 기자, 20여년 전 노동운동을 한다고 공장밥을 먹던 운동권 학생에서 얼마나 달라졌을까?

적어도 옛날보다 왼쪽은 아니다. 오른쪽으로 치우치지는 않았어도, 확실히 옛날보다 오른쪽을 향해 많이 와 있는 것 같다. 살아가는 방식이 그렇고, 세상을 보는 눈이 그렇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도 비슷한 것같다.

20여년 전의 ‘운동권’ 동료나 선·후배들 가운데 어떤 이는 변호사로, 어떤 이는 교수로, 또 어떤 이는 국회의원으로 있다. 시장논리를 설파하는 기업의 중간 간부도 있고, 장사꾼도 있고, 아이들의 공부를 돌보느라 바쁜 전업 주부도 있다. 여전히 ‘운동’ 일선에서 뛰는 이도 있고, 드물게는 ‘전향’을 선언한 이도 있다.

가끔 만나보면, 다들 많이 바뀌었다. 투쟁 전략과 노선을 놓고 다투던 옛 친구들은 자식을 특목고에 보낸 한 친구의 성공담에 넋을 잃다가, 저마다 교육문제에 일가견을 토해낸다. 변호사인 후배는 구속적부심의 최근 경향과 법원 재판부의 성향이 관심이다. 교수인 선배는 며칠 전 다녀온 세미나 이야기에 열중이다. 벤처기업을 경영하는 후배는 정부의 경제정책 비판에 열을 올린다. 386 국회의원의 관심사는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업자에 대한 실질적 금융지원 방안이다. 변호사는 변호사이고 교수는 교수이지, 왕년의 ‘주사파’나 ‘민중민주파’ 그대로는 아니다. 왕년의 ‘운동권’의 모습은 언뜻언뜻 드러나는 열정과,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내비치는 나름의 삶의 원칙들에서 조금씩 배어나올 뿐이다.

이런 이들을 놓고, ‘옛날 이야기’를 하자며 10년 전, 20년 전의 그림자에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왕년의 주사파인 이철우 열린우리당 의원에게 대놓고 “전향을 선언하지 않았으니 간첩”이라고 주장한 한나라당 의원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또 정부·여당의 386들을 겨냥해 ‘왕년의 운동권은 전향을 선언해야 한다’는 기사를 싣고 있는 몇몇 보수성향 신문들이 그렇다. 그에 발맞춰 “나는 전향했다”고 소리치며 ‘뉴라이트 운동’에 나선 일부 ‘왕년의 운동권’도 그런 사람들이다.

이상한 일 아닌가. 운동권이 ‘좌파’라고 한다면, 그 좌파의 상당수는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차근차근 삶과 생각의 부피와 깊이를 더해가고 있는데, 왜 낡으나 새로우나 몇몇 ‘우파’들은 그들의 옛그림자만 쫓으려는 것인가. ‘생뚱맞은’ 일이다.

그 이유를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이야 어떻든 ‘너희들은 빨갱이야!’ 내지르고 나면 지역구에선 “시원하게 말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색깔론이나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제목을 달면 신문이 잘 팔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림자 놀이에 열중하다 보면 어느새 세상은 저만큼 멀어져 있게 된다. 그 자신 한때 공장으로 뛰어들기도 했던 ‘왕년의 운동권’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은 얼마 전 “이철우 의원 사건은 한나라당이 과거에서 변하지 못했다는 것을 웅변해 주고 있다”며 “한나라당의 지도부는 20, 30% 고정 지지층만을 의식하고 도도리표처럼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는 집권할 수 없다는, 한나라당 등 자칭 ‘우파’들에겐 뼈아픈 얘기다.

사족이지만, 사람들이 변한다고 해서 과거를 송두리째 부정하지는 않는다. 과거는 현재의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이가 있다면, 뭔가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심재철 의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현호/정치부 차장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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