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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2.02(목) 19:22

재계의 자충수


귀에 익숙한 고사성어 ‘모순’의 무대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한 저잣거리다.

“한 장사꾼이 창과 방패를 팔고 있었다. 먼저 방패를 자랑했다. ‘이 방패는 어떤 날카로운 창도 막아냅니다.’ 이번에는 창을 집어들었다. ‘이 창은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구경꾼 가운데 한 사람이 물었다.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 장사꾼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 말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의견을 최근 재계가 냈다. 경제 4단체가 들고나온 연기금의 주식 의결권 행사 반대론이다. ‘경제난국 타개를 위한 경제계 제언’이라는 거창한 발표문 제목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지만, 어쨌든 재계는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가 과도한 경영간섭이 될 것을 우려해 발표문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발표문은 자신들의 존립 근거를 스스로 부정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주주에게 의결권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권리다.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기업인들이다. 더구나 그동안 금융 계열사들의 주식 의결권을 제한하려는 정부를 맹렬히 비난해온 재계가 아닌가? 의결권 없는 주식이 있기는 있다. 배당금을 더 받는 우선주다. 의결권이 없다보니 보통주보다 시세가 형편없다.

재계를 이런 ‘모순’에 빠뜨린 건, 경영권 방어에 대한 초조감이리라. 지난해 에스케이에 대한 외국자본의 경영권 위협 이후 재계는 어떻게 하면 외부의 경영권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골몰해 있다. 이런 처지에 막강한 자금력의 연기금까지 가세해 공격해 온다고 생각하면? 매달 2조원씩 불어나고 있는 국민연금이 앞으로 주식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면? 재계로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을 법하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한 게 있다. 연기금은 국내자본이란 사실이다. 자본에 국적은 없다지만,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국적이 쟁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웬만한 기업들의 외국인 주주 비중이 절반을 웃도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맞서줄 ‘국적’ 있는 잠재적 백기사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실제로 재계가 큰 도움을 받은 일이 있다. 지난 3월 에스케이와 소버린이 벌인 경영권 분쟁에서 국민연금은 에스케이 현 경영진의 손을 들어줬다. 재계 역시 이를 의식한 듯 외국자본에 맞서 경영권 방어가 필요한 때에는 연기금의 의결권을 허용하자고 한 발 걸쳐놓았지만, 이건 너무 속이 들여다보이는 처사다.

사정이 다급하다고 원칙을 무시하고 편법을 내세우면 불신이 싹트고, 불신은 상생이 아닌 상쟁을 야기한다. 아니나 다를까? 의결권 반대 뜻을 밝힌 이후 재벌들 사이에서조차 뒷말이 무성하다고 한다.

경영권 위협 노이로제에서 벗어나려면 되지도 않을 연기금 의결권 금지를 외쳐댈 것이 아니라, 의결권 행사를 환영하지는 못할지언정 배당도 넉넉하게 주도록 노력할테니 안심하고 투자하라고 선수칠 정도는 돼야 한다. 그런 뒤 재계가 진짜 할 일은 그 의결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답을 재계는 이미 알고 있다. 지난 9월 강신호 전경련 회장은 회원사들에 이례적으로 서한을 보냈다. “기업이 홀로 경쟁력을 제고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어려울수록 시민사회를 비롯한 모든 이해 관계자와 신뢰를 쌓는 일이 매우 중대하다. 소비자, 부품협력회사, 주주 등 모든 이해 관계자와 협력하자.” 서한의 제목은 ‘기업윤리 제고’이다.

연기금의 주인이 누구인가? 국민이다. 연기금의 주식투자는 그래서, 오히려 재계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기회다. 의결권 금지론은 그 기회를 스스로 박차는 행위다. 초나라 장사꾼의 자충수가 구경꾼을 떠나보내듯이 말이다.

곽노필 경제부 차장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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