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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1.25(목) 20:42

그들이 너무 일찍 알아챘나


“우리는 명문대 입학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학교에 들어왔다. 선배의 빛나는 입시성적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이기주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친구 타도에 이바지할 때다.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무시하고 성적만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아 찍기의 힘과 눈치의 정신을 기른다. 나의 눈치와 이기주의를 바탕으로 성적이 향상되며 남의 성공이 나의 파멸의 근본임을 깨달아 … 눈치 빠른 학생으로서 남의 실패를 모아 줄기찬 배타주의로 명문대에 입학하자.”

여러 해 전 고교생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이른바 ‘우울한 고교 교육헌장’이 다시 인터넷에 나돌고 있다. 한낱 우스개로 넘기기엔 우리 현실을 지나칠 정도로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수험생들에게 명문대 입학은 ‘역사적 사명’ 이상이다. 일생일대의 승부처라고, 가정에서 학교에서 가르쳐 왔다.

휴대전화 입시부정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대학입시에 모든 것을 걸어온 사회인 만큼, 수능부정 파문이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것은 당연하다.

한나절 시험으로 평생 따라다닐 ‘등급표’를 생산하는 학벌사회,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 따지는 풍토, 부정행위를 미온적으로 처리하고 눈감아준 도덕 불감증, 잇따른 경고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교육 당국의 잘못 등이 입시부정의 주요 원인들로 지목되고 있다.

모두 맞는 얘기다. 대응책으로 제시되는 감독과 처벌 강화, 전파차단기 설치, 도덕교육 강조도 당연한 순서다.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과 원인에 대한 진단이 확실한 것에 비해 처방은 궁색하고 안쓰럽다. 도덕 불감증은 학교 윤리교육을 강화하면 나아질까. 전파차단기를 설치하고 휴대전화를 못 쓰게 하면 부정행위가 사라질까. 사회 전반에 걸쳐 기성세대의 부정과 비리가 만연하니, 크고 작은 비리를 발본색원하는 게 대책이 될까?

“이렇게 큰 죄가 될 줄 몰랐어요.”

고개 숙인 학생들은 때늦은 후회를 했다. 실제로 학생들은 국가 공인 시험을 무력화하려는 치밀한 범죄 의도를 품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동원하고 대리시험을 치렀을 수 있다.

그러나 학생들의 후회와 별개로 그들은 너무 일찍 우리 사회의 실상을 알아채 버린 것은 아닐까.

학생들은 대학 수학능력 시험이라는 관문을 부정행위를 통해서라도 통과만 하면, 그 뒤에는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다고 보았다. ‘한번만’ 질끈 눈을 감은 채 양심과 염치를 버리면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유혹이 그들을 수렁으로 잡아끈 동기일 것이다. 한나절의 시험으로 앞으로 사회에서의 대우와 삶의 수준이 달라질 것이라고 믿은 학생들에게 첨단기기 동원과 인터넷을 통한 동조자 모집은 사소한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부정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일탈현상이다. 부정행위를 막는 방법은 원형 감옥형 감시구조를 만들고 첨단기술로 감독하는 게 최선이 아니다. 부정행위로 거둘 수 있는 기대효과를 최소화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치밀한 한두 번의 부정행위나 요행이 통하더라도 결국엔 제 실력이 노출되고 요행과 부정으론 수습할 수 없게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마을 주민을 상대로 한 어물전에서 단골에게 속빈 꽃게를 알배기 꽃게라고 속여 팔 수 있을까. 양궁선수가 어쩌다 요행으로 과녁을 맞히어 태극마크를 달 수 있을까. 속임수가 쉽게 들통난다는 경험과 가르침만이 속임수를 쓰고자 하는 동기를 줄일 수 있다. 개인의 도덕성에 호소하기엔 우리 양심이 너무 약하고, 감시와 처벌은 새로운 기술과 지략을 따라갈 수 없다.

수능이나 대학 졸업장이 갖는 가치를 최소화해야 한다. 요행으로 한 고비를 넘었다 하더라도 갈수록 첩첩산중을 만나게 된다면, 편법에의 유혹에 쉽게 빠지지 못한다. 그런데 실은 어른들이 수험생들에게 ‘명문대 입학이 역사적 사명’이라고, 수능이 ‘마지막 승부’라고 가르쳐온 셈이었다. 인생과 운명을 한번의 요행이나 부정행위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만든 책임이 기성세대에 있는 만큼, 그 과제를 풀어야 할 진짜 수험생도 어른들이다.

구본권 온라인뉴스부장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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