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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1.09(화) 20:22

‘보수’와 ‘구악’


자칭 ‘보수’의 목소리가 날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헌재의 신행정수도법 위헌 결정 뒤에는 부쩍 자신감까지 붙은 모습이다.

이들의 가장 막강한 ‘배후’는 역시 ‘보수’ 언론이다. 이들은 정부·여당에 사사건건 ‘좌파’ 꼬리표를 붙여가며 ‘4대 개혁입법’을 연일 난도질하고 있다.

얼마 전 〈동아일보〉의 과거사 규명 관련기사를 읽다 문득 지난 3월 친일진상규명법 통과 직전 후배 기자가 전한 한나라당 기자실에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통과될 것 같아요.” …… “애는 썼는데 어쩔 수 없어요. 이번은 대의명분 때문에 …” …… “저도 어제 ‘ㅎ’하고 통화했는데, 처음에는 이야기를 잘했다고. 그런데 나중에는 나더러 사정사정 하더라고. 당을 먼저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지.” …… “그럼요. 말이 안되죠. 이건 상식 차원에서 접근해야 되는 건데” …… “그런데 국장은 너무 열받은 거 아니야?”

이날 오후 친일진상규명 특별법이 통과됐으니 아마도 로비가 실패할 것 같다는 ‘보수’ 언론 기자의 보고전화였던 모양이다.

한국의 보수언론은 그만큼 감춰야 할 과거가 많다. 털고 지나가기에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는지 남들에겐 모든 것을 공개하라고 큰소리 치면서도 자기 문제에는 한없이 오그라든다.

〈월간조선〉의 과거도 만만치 않다. 한겨레와의 소송 과정에서 치부가 드러났다. 조갑제 사장은 검찰에서 문제의 ‘한겨레 음해 문건’이 자기 사무실로 배달돼온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들이 “2001년 3월 자기 사무실에서 국정원 관계자한테 문건을 입수했다”고 밝혔다. ‘보수’ 원조라더니, 정보기관의 광고탄압 계획 등 공작 문건을 넘겨받고도 이를 비판하기는커녕 거꾸로 ‘한겨레는 로동신문 서울지국’이라고 써댔으니 언론으로서 최소한의 양심도 저버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셈이다.

양심이 없기는 자칭 ‘보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이 최근 구성한 ‘국보법 태스크포스’ 간사에 장윤석 의원(경북 영주)이 임명됐다. 장 의원은 신문·방송에 잇따라 등장해 보안법이 없어도 웬만한 이적행위는 형법상 내란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여당 주장에 “내란죄는 체제 전복 행위에만 적용된다”며 보안법 폐지론자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장 의원이 내란죄를 논평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1995년 서울지검 공안1부장 시절, 전두환·노태우씨를 불기소 처리하면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악례를 남겼다. 전·노씨가 불과 1년여 뒤 내란죄로 유죄판결을 받음으로써 검사로서 오점을 남겼던 그가 내란죄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자리에까지 나서는 것은 아무래도 염치없는 짓이다.

정형근 의원(부산 북·강서갑)도 이제는 한번쯤 과거를 정리할 때가 됐다.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 담당검사였던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의 책 〈안 검사의 일기〉(새로운 사람들, 1998년) 177~180쪽에는 정 의원을 지칭하는 듯한 대목이 등장한다. “(1987년) 5월11일, 앰배서더호텔 1817호실. 안기부 J단장과 마주 앉았다. …‘안기부로서는 사건 진상이 새로 밝혀지면 정부가 견디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 정부는 5공화국 출범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사건은 절대 깨져서는 안 된다. 이 상태에서 재판이 끝나야 한다. 이것이 안기부 방침이다.’” 안 의원은 박종철씨 고문치사에 가담한 범인이 세 사람 더 있다는 사실을 안기부 주도의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한 사실을 기록하면서 ‘대학 동기였던 J단장’(44쪽)과의 대화를 상세히 전하고 있다. 당시 경찰 고위간부들은 범인도피 등 혐의로 여럿 구속됐지만 정작 그 단장을 비롯한 안기부 간부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고 은폐의 진상 역시 공개되지 않았다.

송복 교수는 최근 한 ‘보수’ 집회에서 “한국의 보수파는 끊임없이 개혁하는 세력”이라고 예찬했다고 한다. 하지만 개혁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양심은 갖고 있어야 ‘보수’다. ‘보수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고는 남의 허물을 논할 자격도 ‘보수’를 참칭할 자격도 없다. 단지 ‘구악’일 뿐이다.

김이택 사회부장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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