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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5.01.24(월) 18:18

과거사 껴안기


지난일을 돌아보기란 쉽지 않다. 변화가 빠른데다 우리 사회와 개인은 앞만 보고 달리는 데 익숙하다. 개인의 삶도 그러하거늘, 나라 차원의 ‘과거 청산’에는 부정적 기류가 일정 부분 형성될 수밖에 없다. 현실의 피곤함은 ‘또 과거사냐’ 하는 알레르기적 반응을 낳는다. 지난 한 해 논란을 거치면서 과거사는 사는 데 도움이 안 되고 미래의 발목을 잡는 공적으로 공격받기도 했다.

새해 초에 한-일 협정과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문서 일부가 공개됐다. 40년 만에 공개된 한-일 협정 문서는 국가에서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가로챘음을 드러냈다. 저격사건 문서는 1974년 광복절에 합창단원으로 참석했다가 숨진 여고생 장봉화양이 대통령 경호원의 총탄에 희생된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해줬다. 당시 수사본부는 그가 숨진 경위에 대해 입을 다물었으며, 수사 기록에 문세광이 살해 피의자로 돼 있었다는 증언만 뒷날 흘러나왔다.

이처럼 새롭게 드러난 사실도 소중하지만, 두 건의 문서는 과거사 논란의 거품을 씻어내준다는 데 더 큰 뜻이 있다.

한-일 협정과 저격사건의 진상 규명 노력은 모두 문서 공개로 간단히 이뤄진 일이다. 과거사가 국력을 소모하고 일상생활에 짐이 될 것이란 우려를 씻어준다. 과거사가 문제된 것은 여태껏 특정 세력이 진상 접근을 거부하며 진실 밝히기를 회피해 왔기 때문이다. 자료를 공개하고 조사를 공정하게 하면 국력의 낭비는커녕 큰 논란이 될 일도 없다. 국민의 알권리를 채워주고, 가려진 진실을 밝혀 ‘해원’을 해주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 때의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나 지원에는 돈이 들지만, 피해자 몫이 경제개발에 투입됐으니 우리 사회가 일정 부분 책임지는 것은 부담이 아니라 사필귀정이다.

과거사는 과거지사가 아니라 현재사다. 가해자에게 과거사일 뿐, 피해자에게는 바로 어제 일이기 때문이다. 일제 때 피해자들의 한맺힌 절규는 수십년째 이어지고 있다. 피와 땀의 대가를 정부가 제멋대로 가져갔으며, 군 위안부들은 아예 존재 자체를 무시당했다고 공개된 한-일 협정 문서는 증언한다. 장양의 억울한 죽음은 권력에 대든 것도 아닌 유탄에 희생됐는데도 이제야 일단이 밝혀졌다. 지하의 그에게나 ‘그렇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나’며 체념하는 가족에게, 비극은 31년 전의 일이 아니라 어제의 일이다. 한가하게 역사학자들에게 맡겨둘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두 건의 문서는 이런 점에서 부질없는 논란의 거품을 씻어낸다.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의 시간 관념에 혼돈이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이며, 편의를 위한 관념적 재구성일 뿐이다. 그런데 미래는 과거와 상관없거나 과거와 대립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구촌은 몇 해 전 마치 찬란한 빛이 쏟아져내릴 듯 새 천년의 미래를 그렸다. 그러나 우리는 밟고 있는 땅에서 두 발을 떼지 못한다는 것을 매일 확인한다. 이를 두고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는 시간의 방향성이 뒤바뀌었다고 한다. 미래로부터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은 필요하지만 비현실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과거에서 흘러와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렇기 때문이다.

과거는 곧 현재일 뿐 아니라 미래로 가는 길목이다.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언정 민족 반역자는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치 부역자를 처단했기 때문에 이런 미래를 장담할 수 있겠다. 우리 사회가 가치관을 비롯한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까닭은, 과거를 껴안지 못한 데 있다. 역사를 숨기고 왜곡하고 외면하는 사회에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진실과 화해는 정치가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요, 교육이다. 사람은 지나쳐버린 진실과 다시 마주칠 때 감명을 받는다. 한나라당으로서 과거사는 결자해지를 하고 당이 활로를 찾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박근혜 대표가 탄광촌과 노인정을 부지런히 누비고 과거사를 외면하면, 그것은 우리 몸의 외상과 부스럼 따위에 입맞추고 정작 심각한 속병과 정신적 상처는 나몰라라 하는 것과 같다. ‘지병’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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