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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그리고 공습/ 고영재


아프간 하늘에 포탄의 폭우가 쏟아졌다. 테러를 응징하는 미국의 결연한 의지 앞에 세계는 숨을 죽였다. 두손을 들어 이를 지지하는 소리만 높다. 전쟁은 곧 `공개적인 테러'임을 나무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힘은 역시 정의임을 일깨워준다.

555. 한글 나이테에 아로새겨진 숫자다. 숫자는 한글 위에 켜켜히 쌓인 핍박의 더께를 어렴풋이 가늠케 한다. 오늘도 `공습'에 시달리는 한글살이는 숙명인가. 수백년 한문의 억압에서 벗어난 날도,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날도 한글 해방의 날이 아니었다. 오늘 국제어 영어의 무차별 공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언문'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어는 이 시대의 첨단무기다. 생존의 길도, 번영의 길도, 국제경쟁력의 원천도 거기에 있다'는 믿음이 아무런 의심없이 퍼지고 있다. 영문으로 적힌 상품은 최고급을 보증한다. 기업 명칭에서도 영문자는 국제화를 암시하는 부호가 되었다. 한글 이름이나 표기는 어쩐지 낯설다. 촌뜨기나 시대흐름을 모르는 이들의 어설픈 선택으로 여겨진다. 영어는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식인의 징표가 되었다. 민족지들도 영어 찬가를 부끄러움 없이 불러댄다. 한글 정신을 기리는 <한겨레> 역시 요즘 영어에 고개 숙이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따끔한 질책을 물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이른바 국제화 시대에 과연 영어는 그토록 쓸모있는 연모일까. 전국토를 영어교습소로 만들만큼 경제성이 보장된단 말인가. 영어의 힘은 국제경쟁력을 이루는 잔가지에 지나지 않음은 분명하다. “영어보다 수학이나 물리 등 기초과학, 기술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지적을 곱씹어볼 일이다. 또 진정한 세계주의는 우리 것을 지키는 데 있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우리 것(문화)을 우리말과 우리 솜씨로 빚어내는 일을 어느 누가 더 잘할 수 있겠는가. 다양성이 추구되는 지구촌 시대에 `닮아가기'야말로 실패의 지름길 아닌가.

언어의 오염은 곧 환경 오염이기도 하다. 자연환경 오염은 생태계 파괴로, 생물의 당양성 훼손으로 이어진다. 언어의 오염은 민족의 소멸로, 이는 독자적인 문화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케케묵은 진실을 굳이 일깨울 일인가. 언어학자들은 걱정한다. “현존 6000개 언어 가운데 그 절반은 21세기에 사라질 것이다.”

영어 열풍에 깃든 맹목적 믿음과 `과천에서부터 기는' 무기력과 패배주의를 새삼 경계한다. 언어는 정신이라 했던가. 그 열풍 속에 미국의 정신이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다. 미국식 시장논리가 `재래시장'의 혼을 빼놓았다. 미국의 가치관은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입맛까지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미국의 정신적 식민지가 아니라고 누가 자신있게 반박할 수 있는가.

그 식민지화엔 정부 몫이 컸다. 김영삼 전대통령의 `세계화' 구호는 영어열풍에 불길을 당겼다. 그 정신은 김대중 정권으로 이어졌다. 영어 조기교육이 추진되고, 일부 언론의 맞장구가 뒤따랐다. `지구촌경제'의 전사들, 경제학자나 기업인들의 뜨거운 호응은 너무나 당연했다. 문화적 침공의 후유증, 미국혼이 한반도를 휩쓸어 버리는 따위는 괘념할 일이 아닐 터이기에. `영어를 공용어로!' 최근의 얼빠진 주장도 전혀 낯설지 않게 되었다. 테러를 응징하는 전쟁은 정당하다는 논리가 지구촌을 침묵시키듯.

좋다. 영어, 미국 문화, 미국식 민주주의 다 좋다. 그러나 우리는 아프간 사태에서 움직일 수 없는 교훈을 읽는다. 아프간을 향한 미사일은 미국의 군사력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패권주의, 곧 미국정신이다. 아프간이 지키고자 하는 것도 그 땅이 아니다. 그 정신이다. 빼앗긴 들은 언제든 되찾을 수 있으나 빼앗긴 정신은 되살릴 수 없다. 한번 빼앗기면 영원히 사라질 뿐이다.

지구촌을 쥐락펴락하는 절대권력 앞에 `한글 지키기'는 무모한 도전일까. 한글날 아침에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다.

고영재/ 논설위원kyjko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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