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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5.01.30(일) 19:53

제주4·3과 평화의 섬


1991년 4월 제주국제공항 주변 도로에는 색다른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붉은 바탕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깃발, ‘철의 장막’의 상징인 소련 국기였다. 그 ‘적국’의 대통령(고르바초프)이 역사상 처음 열린다는 한-소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한 것이었다.

해방직후 국제적인 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혹독한 희생을 치렀던 제주도민들은 이 역사의 변화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어느 지역보다 강했던 레드 콤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당면 과제였다. 이런 제주도민들에게 ‘평화의 섬’이란 다소 낯선 어휘가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 이후 중국 장쩌민, 미국 클린턴, 일본 하시모토·고이즈미 등 한반도 주변 열강 정상들의 제주 방문이 이어지면서 ‘평화의 섬’ 논의는 더욱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제주도민들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북한 동포에게 감귤보내기운동을 벌였고 남북민족평화축전 등을 통한 활발한 민간교류활동도 추진했다. 2001년에는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 정착의 논의의 장으로서 제주평화포럼을 창설하여 ‘평화의 섬’ 실현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지난 27일 정부로부터 제주도가 ‘세계평화의 섬’으로 공식 지정받는 꿈을 이루어냈다. 외국의 경우 일본 히로시마, 독일 오스나브뤽 등의 평화도시가 있지만, 이 경우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정한 것이고, 제주도처럼 국가차원으로 지정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정부는 앞으로 제주도를 국제자유도시로 육성하고 국제평화센터, 동북아평화연구소 설립 등 평화 실천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제주도민들은 들떠 있다. 거리에는 ‘평화의 섬’ 지정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나부끼고 이를 기념해서 공짜술을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음식점도 있다고 한다. 제주도민들이 이처럼 평화를 갈망한 저변에는 해방 직후 동서 냉전의 와중에서 큰 희생을 치른 뼈아픈 역사의 상흔이 깔려 있다. 그것이 바로 제주4·3의 아픔이다.

제주4·3의 진실은 오랜 세월 냉동실에 갇혀 있었다. 10여 년 전에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20세기에 일어났던 세계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제주4·3을 선정한 바 있다. 요미우리 편집자는 그 선정 동기에 대해 두가지 이유를 밝혔는데, 하나는 제주 섬과 같은 좁은 땅에서 3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학살된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중대한 사건이 50년 동안 한국 안에서조차 덮여 왔다는 점을 들었다.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 인식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신문은 “4·3사건에 대한 재평가는 한국 중앙정부의 민주화 수준과 비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역사는 진전한다고 했던가. 김대중 정부시절인 2000년에 드디어 제주4·3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추진되었다.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그 진상조사 결과를 토대로 제주도민과 유족들에게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공식사과하기에 이른다.

제주도민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4·3의 진실규명운동을 벌였다. 정부와 정치권을 향해서 그 진상을 조사해 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내세운 슬로건은 보복이나 새로운 갈등이 아닌, 용서와 화해이었다. 비극의 역사를 딛고 평화와 인권을 지향했던 것이다.

청와대에서 열린 평화의 섬 지정 선포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는 과거사의 아픔을 진실과 화해의 과정을 거쳐 극복해나가는 모범을 보였다고 평가하고, 이런 조건이 평화의 섬을 지정하게 된 원동력이 됐다고 밝혔다. 평화의 섬 선언문에도 “4·3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키며”라는 표현이 있다. 이제 제주도민들은 ‘평화’란 브랜드를 안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새로운 출발선상에 서 있다. 제주도민이 보여준 평화의 정신은 한반도와 동북아,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위한 한알의 밀알이 될 것이다.

양조훈/제주4·3사건진상규명위원회 수석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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