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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3.04.27(일)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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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침공이 남긴 것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침략전쟁을 반대해온 사람들로서는 보기 괴로운 장면들이 한동안 텔레비전 화면을 뒤덮었다. 침략군을 맞은 이라크군의 저항이 어이없을 만큼 무기력하게 허물어졌을 때, 그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나 또한 그렇다고 뜻밖의 일도 아니었다. 엄청난 물량적 자원과 각종 첨단장비를 갖춘 미군의 무력에 견주면 오랜 경제봉쇄로 피폐해진 이라크의 국방력은 실로 보잘것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웬만큼 힘이 비슷한 맞수끼리 겨루다가 이긴 것이 아니라 튼튼한 거인이 쇠약한 소인을 일방적으로 짓밟아 이긴 것이니, 부시의 승리선언은 가소롭고도 희화적이다.

그러나 정작 고통스러운 것은 이 부도덕한 침략을 다수의 미국인들이 지지했고, 부시의 승리선언에 절대다수의 미국인들이 환호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주류 미국인들은 어떤 사회심리적 연유로 이런 집단적 가학성에 사로잡히게 되었는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나라의 국민 다수가 이처럼 공격적인 심성과 왜곡된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대량살상 무기보다 더 위험한 재앙을 인류에게 초래할지 모를 일이다.

두번째로 보기 괴로운 장면은 이라크군의 예견된 패배 이후 점령지 바그다드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거리로 뛰쳐나와 상점과 은행을 약탈하고 물건을 어깨에 메고 달리는 일부 이라크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독실한 무슬림들의 나라에서 어떻게 저런 불법이 자행될 수 있는가 하고 개탄하는 것이야말로 도리어 비현실적인 도덕주의다. 여러해 전에 뉴욕시에 몇시간 동안 정전된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산업문명의 중심지인 미국 대도시 시민들은 이 캄캄한 어둠에 어떻게 대처했던가. 문명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폭력과 난동이 뉴욕 거리를 온통 무법천지로 만들었는데, 이런 사태를 상기해 볼 때 20년이 넘는 독재정권의 억압통치와 끔찍한 폭격의 공포가 사라지고 난 직후의 진공적 상황에서 일부 이라크인들이 잠시 이성을 잃었다고 하여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그다드의 박물관에서 17만 점의 유물이 사라진 것은 이와 전혀 다른 문제다. 수천년 보존되어온 인류문명의 유산들이 그 방면의 전문가들에 의해 어디론가 잠적하였는데, 현재 이라크의 치안상황을 감안할 때 이런 미증유의 문명 범죄는 치안의 최고 책임자도 모르게 일어날 수 있는 엽기적 사건이 아닐 것이다. 순전히 짐작에 불과하지만, 이번 이라크 침략의 숨겨진 목적 가운데 하나가 문화재 약탈이었을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바그다드 시가지가 미군에게 유린된 다음 보기 괴로웠던 또하나의 장면은 후세인 정권의 독재정치와 그 일가의 호화생활을 입증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다. 부패는 독재의 필수적 부산물이라 할 수 있으므로 문제는 후세인 정부가 국민의 자발적 동의에 기초해 있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식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라크에 강요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이 지껄이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 이름에 걸맞은 진정한 내용을 갖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번 이라크전은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와 부시 정권의 미국이라는 극단적인 보기를 통해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인 재검토를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스러운 시선을 돌려 우리 자신을 냉정하고 침착하게 바라보는 일이다. 지난날 외세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들은 어떻게 반응했던가. 지배계급이라면 나라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 경우에는 개인과 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자신을 주권자로서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민주주의야말로 유일한, 그리고 최대의 무기임이 더욱 확실해졌다. 핵무기가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 전체의 평화롭고 자연스러운 삶이 국가체제를 만들고 지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갈 길은 오직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염무웅/영남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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