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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3.04.06(일)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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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지키는 힘 / 노서경


무고하고 무방비 상태인 약자를 강자가 내리치는 장면은 매우 부당하지만 새삼스럽지 않다. 이라크라는 나라에서 태어났고 살게 되었다는 것밖에 죄목이 없는 사람들이, 아이들이 다치고 쓰러지고 먹을 것을 찾아 울부짖는 장면은 수없는 부당한 폭력의 연장선에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이 자행한 가공할 유대인 학살의 명분은 ‘그들과 우리는 인종이 다르다’는 것뿐이었다. 근작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다시 보지만, 최정예 무력을 갖춘 나치 독일이 폴란드로 진격해 들어가서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 약자에게 남은 방어수단은 하나도 없었다.

옛소련의 스탈린 체제 아래에서 수백만,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름으로 무고한 희생을 당했다. 농민들, 지식인들, 전날의 동지들, 조국을 사수했던 장성들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처형과 유배와 강제노동에 처해졌다. 더 거슬러올라 미국이 인디언들을, 후에는 흑인들을 다룬 탄압의 역사는 어떤 비극을 만들었던가. 그뿐이 아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이 벌인 가혹행위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그러나 폭력은 강국에서만, 제국주의 국가에서만 자행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라크전쟁을 보면서 한 이스라엘의 군사전문가는 1950년대의 알제리전쟁을 상기하고 있다. 미국이 치른 베트남전쟁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알제리전쟁에서 프랑스는 상대와 비교할 수도 없는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도 이기지 못한 일을 그는 지적한다.(〈프레시안〉 4월3일치) 전쟁물자와 신식 전법과 40만의 병력을 투입하고서도 프랑스는 빈곤과 열세의 땅인 알제리에서 물러나왔다. 물론 당시 알제리와 지금 이라크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알제리인들은 그때 가난해도 독립을 원했다. 1950년대 후반의 세계정세는 독립을 외치는 식민지에 유리했다. 이라크는 지금 독재정치라는 깊은 병인을 갖고 있다. 역설인 것은 그렇게 전쟁으로 독립을 이룬 알제리에서 1992년 이후 이번에는 자기들 손으로 무고한 자기네 국민을 처단하고 납치하고 고문했다는 사실이다. 게릴라 무장단체들과 정부 간의 내전은 1998년 이후 가라앉은 편이지만 알제리인들의 그 고통을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라크 다음에는 북한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지금 우리는 위기라기보다 기회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람을 가르친다. 다른 사상, 다른 집단을 인정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의 노고에 예의를 표하고 부당한 제도의 개선에 노력하도록 사회 주도세력을 이끈다. 그러지 않으면 전체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전쟁으로 실감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일어난 여성 참정권이나 사회복지, 노동자 민주주의, 그보다 앞서는 사법제도 개혁은 모두 그러한 긴장의 선물이었다. 개인의 삶은 개인에게 책임이 있을 뿐이라는 방자한 논리는 대전쟁 후에는 수그러졌다. 개인의 자유는 필히 보장되어야 하지만 소수의 개인들이 나머지 약한 개인들에게 위해가 될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기회를 맞았다면, 그러한 가능성은 누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우선 거리의 사람들이 긴장은 했을지라도 겁내지는 않는다. 이는 우리의 보이지 않는 자산이다. 그리고 다른 곳도 아닌 국회에서 이라크 파병안에 반대하는 68표가 나왔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반전만이 올바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반전은 정치적 성숙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도 우리는 이를 시작으로 1950년대에는 비동맹세계에서 열외에 처해졌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표시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언론이 반전운동의 메카처럼 된 것은 새 언론을 여는 시작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려는 언론의 의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개혁을 이끌어냄으로써, 이 사회에 정의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보여줌으로써 전쟁에 대한 우리들의 의연함에 응답할 것이다. 진정한 민주화는 우리가 평화를 지켜낼 수 있는 최대의 전략이자 약자가 쥐고 있는 하나뿐인 대안이다.

노서경/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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