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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3.03.23(일)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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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문화의 초라한 몰골


우리나라의 지식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문화 수준은 어느 단계에 도달해 있는 것인지. 저 옛날엔 불교를 수용하되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세웠으며, 그 철학을 다시 중국에 전파할 수 있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중국 학자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학문했다. 한때는 그 자의식이 지나쳐 오히려 오만에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국가를 운영하기에 우리의 문화역량은 너무 초라하다.

얼마 전 영미 고전작품들의 번역 현황을 연구한 내용이 보도된 바 있다. 이를 보면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라는 소설의 우리말 번역본이 21종이나 된다고 했다. 한 작품을 두고 그렇게 여러 번 번역이 이루어졌다면 언뜻 우리 문화도 꽤 수준 높고 다양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 번역본 가운데 14종은 다른 번역본을 대본으로 해서 오류마저 베낀 표절이란다. 독자적으로 번역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오역과 부정확한 번역으로 작품성을 훼손했고, 심지어 까다로운 부분은 생략하거나 얼버무린 경우도 있으며, 번역문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종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추천할 만하지 못하다고 했다. 인문사회과학 서적들도 이와 사정이 다르지 않다.

십수년 전 독일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사전을 열심히 찾아 나름의 독일어 문장을 만들어 제출하곤 했는데, 한번은 독일인 교사가 나에게 “왜 당신은 늘 19세기에나 사용되던 단어만을 골라 문장을 만드느냐”고 정색을 하면서 물었다. 그 지적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100년 전 단어를 골라 쓰다니. 까닭은 ‘한독사전’에 있었다. 우리의 독일어 사전이라는 것이 그 옛날 일본에서 나온 것을 베껴 만든 것이다 보니 여태 19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뒤로 새로운 사전이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외교통상 등 국제협상에서 정부가 보여준 무능은 익히 접해온 바다. 예컨대 우리는 불과 10여 년 전 노태우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할 때 나라 안에서 러시아말 통역인을 구하지 못해 큰 망신을 당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냉전에 찌들어 러시아어 전공자 하나 키워낼 수 없었다. 이런 모습이 현대 한국 문화역량의 현주소가 아닐까

그럼에도 우리는 은근히 세계 10위권의 위상인 것처럼 뻐기고 있다. 무역·체육·군사 등의 지표는 그런 셈이다. 하지만 이런 지표들로 가려진 우리 사회의 실상은 기대치와는 사뭇 다르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신태영씨의 분석으로, 지금 우리의 지식축적 정도는 미국의 6%, 일본의 14%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2000년 현재의 일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35년은 더 걸려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본과 비교하더라도 35년은 뒤떨어진 셈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형편이 좋은 과학기술 분야 중심의 분석임에도 그렇다.

시간강사와 교수 등 10여만명 연구자를 위한 정부의 학술진흥 연구비가 2000억원 남짓 된다. 그나마도 근자에 획기적으로 늘어난 액수다. 이는 전투기 40대를 사들이는 차세대 전투기 사업비 5조원의 4%에 불과하다. 국가의 한해 학술진흥비가 전투기 두 대 값도 안 된다. 전투기를 아무리 새것으로 바꾸면 무엇하나. 현재 한반도 전쟁위기는 미국의 북한 폭격 음모에서 야기되고 있는데.

국가 운영의 방향이 너무 뒤틀려 있다. 전투기는 새것으로 바꿀 줄 알지만 지식축적이 선진국에 30년 이상 뒤떨어진 사실은 무시한다. 후진적인 문화역량과 퇴영적인 사고방식에는 부끄러운 줄 모른다. 지난 40여년 간의 파시스트적인 통치가 초래한 현상이다. 거기에 더하여 요즘은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몰가치한 경쟁력 지상의 논리가 교육 개방까지 강요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국방비로 일본이나 독일보다 두세 배나 높은 비율인 국가예산의 15%를 쏟아붓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전쟁이 아닌 평화세계에 맞는 국가운영의 철학을 확립해야 한다. 나라의 자주권은 수준 높은 문화능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안병욱/가톨릭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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