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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3.03.03(월)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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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설가의 운명 위에 찍힌 두 줄기 역사


지난주 이 나라는 한 뛰어난 문학적 거인을 저세상으로 떠나 보냈다. 소설가 이문구가 바로 그 사람인데, 그는 우리 시대의 어느 문필가보다 풍부한 우리말 어휘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문체를 구사하였다. 이 점에서 아마 그는 홍명희·염상섭·채만식에 견줄 만한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문단적 이력은 아주 남다른 데가 있다. 그는 해방 뒤 반공우익 문단의 좌장격인 작가 김동리의 수제자로서, 김동리가 이사장으로 있던 한국문인협회 기관지 <월간문학>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문인협회 이사장 선거에서 김동리가 오랜 동반자 조연현에게 패한 뒤 창간된 <한국문학>에서도 이문구는 스승을 대신한 실질적 편집 책임자였다.

완강한 보수적 반공주의자 김동리의 명의로 발행되는 잡지사 사무실에서 애제자 이문구가 한 일은 유신체제에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문인들과 함께 1974년 1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을 모의하고, 이듬해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에 즈음하여 문인들의 격려광고를 모집한 것이었다. 이런 활동들 때문에 그는 몇차례 정보기관에 끌려가기도 하였고, 심지어 우습게도 5공정권 출범 때는 정치활동 금지자 명단에 끼기도 하였다.

김동리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태도와 동료 문인들의 저항적 자세 중에서 이문구의 정체성은 어떤 것인가. 우선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보수와 진보, 반공과 용공 같은 이념적 선택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간 같지 않은 것’이라는 막연한 표현에 내포된 비열함 이외의 모든 인간적 다양성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의 교제범위는 그러니까 거의 제한이 없었다. 지난달 28일의 그의 문인장이 문인협회·작가회의·펜클럽 등 세 문인단체 합동으로 치러진 것은 한국문학사에 처음 있는 일로서, 아마 앞으로도 다시 그런 일이 있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문구와의 개인적 연관을 떠나서 생각해 보면 문인협회와 작가회의는 지난 역사로 따지든 미래를 내다보는 지향으로 살피든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차이를 가진다. 문인협회는 굳이 일제 식민지시대의 ‘조선문인협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해방 후에만도 오욕과 굴절로 점철되어 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만송족’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제는 별로 많지 않겠지만, 4·19혁명 전야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문학인이 얼마나 더럽게 타락할 수 있는지 그것은 여실히 보여주었다. 박정희가 유신이라는 것을 선포했을 때, 전두환이 대통령 간접선거 제도를 유지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그 밖에 독재권력이 인권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짓밟는 폭거를 저지를 때마다 문인협회를 비롯한 각종 어용단체들은 뭐라고 성명서를 냈던가. 그 과거에 대한 한마디 반성과 사죄도 없이 기득권에 안주해 오던 반민족·반민주 단체들이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하여 화해와 단결을 입에 올리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그의 소설에도 아프게 묘사되어 있지만, 이문구는 6·25전쟁 시기에 민족의 분열과 이념의 대립으로 인해 가정이 쑥밭으로 되는 것을 체험했다. 그의 부친은 양반가문 출신임에도 평등세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가 되어 파멸의 길을 걸었다. 이문구는 전쟁 중 남로당 간부인 부친과 형이 포승에 묶여 산 채로 고향 앞바다에 수장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반면에 할아버지는 그에게 양반의 체통을 전수하고 한문적 교양을 가르친 정신의 근원이었다. 작가 이문구의 자부심은 그의 할아버지를 매개로 하여 저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에 튼튼히 연결되어 있었다. 집안의 이단아인 부친도 파렴치한 일로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는 데에 그는 깊은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50년대 말 쫓기듯 고향을 떠난 그는 5, 6년 동안 막노동을 하면서 젊은날을 견디었고, 그의 민중감각은 이 경험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본질적으로 보수적 성향과 양반적 체질을 지녔으되, 현대사의 비극을 통해 서민적 생활 현실의 한가운데를 살아갔던 작가 이문구의 분열된 삶, 그 분열과 모순 자체가 어쩌면 그의 정체성인지 모른다.

염무웅/영남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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