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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2.12.08(일)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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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의 존재와 대통령의 조건/ 염무웅


여중생 압사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날이 갈수록 거세게 끓어오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여론에 민감한 주요 정당 대통령 후보들이 입을 모아 부시의 공식 사과와 소파 개정을 요구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의 하나는 국민들의 규탄 열기가 전국적으로 고조된 것이 압사사건 당시가 아니라, 궤도차량 관제병과 운전병에 대한 재판이 무죄평결로 마무리된 시점이라는 사실이다. 뜻밖의 사고로 죽거나 다치는 일은 불행히도 사람 사는 곳 어디에서나 아주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피해자는 충분한 위로와 보상을 받아야 하고, 가해자는 비록 어쩔 수 없는 실수였다 하더라도 응분의 법적·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가해의 정도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조사와 재판과정만이 보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미군 병사들에 대한 재판은 국민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유린한 편파적인 요식행위에 불과했고, 따라서 국민들은 대한민국 법체계 위에 군림한 미군 법정의 오만무쌍함에 대해 분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미군의 이런 오만함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민주화와 경제발전으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오히려 미군의 자세는 근년에 조금씩 겸손해졌다고 보아야 할지 모른다. 과거 수많은 미군 범죄사건들이 독재정권의 반공안보적 비호 밑에 흐지부지 파묻힌 것에 비한다면, 이번 항의시위는 그래도 ‘할 말을 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근본적인 것은 주한미군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그리고 미국과 한반도 간의 관계의 본질에 대하여 숙고하는 일이다. 다들 아는 바와 같이 미군은 1945년 9월8일 남한에 들어와 일본군 무장해제와 행정권 접수를 실시하였다. 그보다 며칠 전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는 남한 상륙에 즈음한 성명을 발표하여 “주민들에 대한 포고와 명령은 현존하는 여러 관청을 통해 하달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다시 말하면 미군은 처음부터 일제 식민지통치기구의 합법적 계승자로서 이 땅에 진주하였고, 주한미군 사령관은 식민지 총독에 준하는 위치에서 3년 동안 군정을 펼쳤던 것이다. 인천에 처음 상륙한 미군들이 환영 나온 군중을 폭도로 오인하고 총을 쏘아 사상자가 났던 일화는 이런 점에서 극히 상징적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고, 주한미군의 지위에도 크고 작은 변동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불변적인 요소가 한-미 관계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음을 우리는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정국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완고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던가 이승만·장면·박정희의 정치적 말로는 왜 그와 같은 비극의 모습을 띠었던가 광주학살의 책임자는 무슨 까닭에 레이건 정권으로부터 그처럼 노골적인 환대를 받았는가 왜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 후에도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는 말을 잊을 만하면 되풀이하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이 나라에서 미국이 보이지 않는 일종의 거부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치가들의 이른바 ‘통일 후 미군주둔’론은 국민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미국 정부에 하는 것이다. 통일이 너무나도 요원하게 여겨지는 과업이므로 정치가들로서는 그 아득한 시점에서의 미군주둔 여부를 국민들이 지금부터 심각하게 고민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부터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들은 어느 외국에 대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나라의 국민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말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 주한미군의 존재가 활용하기에 따라서 동아시아 평화의 지렛대가 될 수 있다면 그렇다고 말하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해야 한다. 대안 없는 미군철수 주장보다는 그것이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 어떻든 결정권을 국민에게 돌려야 하며 어떠한 외부의 거부권도 이제는 거부되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 주권국가 대통령의 조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염무웅/영남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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