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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5.02.20(일) 19:29

과거사 털기


개그맨의 시초라 평가받는 고영수씨가 절정의 유머감각을 과시하던 시절의 얘기 한토막. 그는 ‘꺼진불도 다시 보자’란 불조심 표어에 문제가 있다고 운을 뗀 뒤, 꺼졌는데 다시 보고 또다시 보다가 결국 삼촌이 돌아가셨다며 그 표어 안에 ‘몇회에 걸쳐’ 다시 보자라는 사실을 명기해야 한다고 익살을 부린다. 우리의 ‘모든’ 과거사를 시기에 관계없이 완벽하게 정리하고 기억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고영수식 재담에 기대어 생각하면 역사의 망각 시효라도 설정해야 할지 모른다. 경박하고 무책임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상상일 수도 있다. 얼마 전 국정원 과거사건 조사에 나선 과거사진실위원회가 수많은 의혹사건 중 우선 눈여겨볼 ‘1차 집중과제’를 선정한 것도 그러한 현실적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발생 시기나 관련 당사자의 이해에 관계없이 방점을 찍어야 하는 역사도 반드시 존재한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현실적 갈등은 방점을 찍어야 하는 역사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더구나 방점을 찍어야 할 역사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외견상 갈등은 격렬해 보인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이것은 갈등이 아니라 한쪽의 일방적인 어거지에 불과하다.

최근 상지대 강만길 총장과 한상범 의문사진상규명위원장을 둘러싼 인신공격성 논란도 그런 어거지의 한 사례다. 일부 언론이 거두절미하고 보도한 두 원로학자의 박정희 전 대통령 비판 발언에 대한 ‘늙은 기회주의자, 정권에 줄대기, 망령들었다, 빨갱이’ 따위의 원색적 비난은 도가 넘었다. 지난 세월의 학문적 업적과 올곧은 처신으로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양심적 지성’으로 평가받는 두 학자의 위치를 감안한다면 더 그렇다. 그들의 과거사 바로보기 주장에 대해 “과거를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과거 공과는 있는 그대로 봐야 하는 게 역사학자 평가의 몫”이라고 일갈하는 젊은 야당 의원의 근엄한 표정은 실소를 자아내기 적당하다. 나는 과거사 진상규명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마치 그것이 비현실적이고 비생산적인 것처럼 매도하는 일부의 주장을 납득하기 어렵다.

두 집단에 영화를 보게 한 뒤 한 집단은 영화의 결말 바로 전에 관람을 중단시켰고 다른 한집단은 끝까지 영화를 보게 했다. 몇 달 뒤에 영화를 기억하게 했더니 결말을 보지 못했던 집단이 영화를 끝까지 보았던 사람들보다 그 영화에 대해 훨씬 더 생생하게 기억했다. 인간은 완성된 것보다 중단된 과업에 대해 훨씬 잘 기억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아귀가 맞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인과관계를 맞추려는 본능적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해결되지 못한 중대한 일은 꿈에서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혼돈을 털어놓고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갖추지 못하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된다. 일부 학자들은 ‘털어놓기’라는 심리학 이론을 통해 이런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납득할 수 없고 이해가 불가능한 과거 역사에 대해서도 인간은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 결론을 보지 못한 채 끝낸 흥미로운 영화처럼 미진한 과거사는 심리적 배경으로 물러나지 않고 계속 전경에서 아른거린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거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를 방해하는 현실적 요소가 된다.

사람은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부조리한 일을 당하게 되면 분노하기보다 자기 탓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겪은 상황의 앞뒤를 맞추기 어려운 경우, 인과관계를 맞추려는 본능적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자기 탓’이기 때문이다. 과거사 털어놓기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자기체념이나 피해자 탓하기 오류 같은 병적인 심리가 번져간다. 10·26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임상수 감독은 자신이 사실을 보여주면 그 사실이 생각을 낳을 거라고 기대했노라 말한다. 그 말 속에 과거사 털어놓기의 핵심이 담겼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거사를 있는 그대로 밝히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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