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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사설/칼럼 등록 2003.10.22(수) 18:38

전쟁이 남긴 ‘선물’

’전후’ 이라크에서 석 달 동안 긴급구호 일을 하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병이 났다. 갑자기 왼쪽 입 근처가 마취주사를 맞은 것 같더니 순식간에 눈 근육까지 뻣뻣하게 마비가 왔다. 왼쪽 팔도 몹시 저리고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며 감각이 무뎌져 갔다. 얼마나 놀랐던지. 그 길로 한방의료원에 가서 응급처치를 하고 한숨 돌리니 지인인 한의사 선생이 혀를 끌끌 차며 협박조로 말한다.

“당장 병가를 내고 쉬지 않으려면, 딴 병원에 가서 치료하세요.”

병명은 극심한 탈진으로 인한 안면 및 수족근육마비 전조. 나는 주말에 푹 자고 나면 괜찮을 거라고 가볍게 여겼는데 한의사는 엑스레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조금만 심했다면 반신마비까지 올 수 있었던 심각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나는 내가 무쇠로 만든 인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지금은 병가를 내고 벌써 한달째 물리치료 및 침과 한약으로 다스리고 있다.

치료 과정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왕복 세시간 거리인 병원을 일주일에 네 번씩 가야 하는 것도 고역이고, 10분만 말을 해도 뺨에 얼얼하게 마비 증상이 오는 것도 고역이다. 제일 큰 고역은 책 등 활자를 보지 말라는 거다. 특별히 신문은 되도록 읽지 말라는 당부였다. 뇌신경과 연결된 시신경이 긴장상태라 작은 글씨를 보지 말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글씨 크기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였다. 요즘 연일 파병이다 재신임이다 신경 쓰이는 일투성이인데, 신문 읽고 화내면 그날 받은 치료와 먹은 한약이 모두 허탕이라며 이런 조언을 해 준다.

“‘나는 바보다’라고 다 생각하세요. 화내지 말고.”

한약이나 침보다 화가 훨씬 세다는 얘기다. 하기야 화났을 때 나오는 위산은 면도칼도 녹일 정도라니 얼마나 독한지 짐작이 간다. ‘허탕’이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요즘 화를 내고 나면 당장 목 뒤가 뻣뻣해지고 눈 주위에 경련이 인다. 그러면 혹시 이게 본격적인 마비의 전조는 아닌지 겁이 덜컥 난다. 나 역시 치료 차원에서 화를 내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나는 화가 나면 그 순간 벌컥 화를 내고 금방 잊어버리는 성격이다. 그렇게 하면 마음 속에 있는 화를 외부로 쫓아내기 때문에 정신건강에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화도 자꾸 내면 그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해 더욱 자주, 더욱 강도 높게 그리고 점점 작은 일에도 화를 내게 되어 있단다. 그러니 병이 빨리 낫고 싶으면 될수록 화를 내지 않든지, 화가 났다면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이걸 제대로 하려면 긴 세월 수양하고 내공을 쌓아야겠지만, 아쉬운 대로 나는 내게 맞는 방법을 모색, 실험 중이다.

가장 자주 쓰는 방법은 최근 읽은 책에서 힌트를 얻었는데, 화가 나는 순간 거울을 들여다보는 거다. 거울 속의 잔뜩 긴장되고 상기된 내 얼굴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이렇게 내 얼굴 보고 딴생각 하느라고 정작 화나는 일은 잠시 잊게 되는데 그 사이에 화가 많이 누그러든다. 집에 있을 때는 옥상으로 올라간다. 널리 알려진 방법인데 산을 보고 심호흡을 하면 화가 확실히 가라앉는다. 내가 개발한 방법은 언쟁중 상대방이 말을 할 때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는 거다. 내 대답이 한 박자 느리기 때문인지 둘 사이의 팽팽한 기운이 놀랄 정도로 느슨해진다.

‘된장과 구더기’ 방법도 효과가 크다. 본당 수녀 분의 조언인데 된장에 구더기 슬듯 개인도 나라도 100% 좋은 것, 의로운 것만으로 채워진 완전 무균상태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느 쟁점이나 특정 인물에 대해 화가 뻗치는 순간, ‘피할 수 없는 된장 속 구더기’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면 일단 속이 편해지면서 신기하게도 벌컥 나오려던 화가 주춤한다. 화를 다스리는 자가 천하를 다스린다고 했던가. 나는 언감생심 천하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이번 병이나 잘 다스려 하루빨리 이라크로 다시 갔으면 좋겠다.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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